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 ⑭일 많은 중등교육과

1978년 말 안동교육청 장학사로 있던 나는 다음 해 근무할 희망 부서 내신을 냈다. 시·군 장학사들은 교육위원회 중등교육과 근무를 선호했지만 나는 '하처 불문, 일반계 고등학교 교장'으로 내신서를 냈다. 79년 2월 말 인사 발표에 내 희망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3월 21일 자로 나를 포함하여 4명이 중등교육과 장학사로 발령이 났다. 누가 우리를 발탁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교원 자격증 부정 발급 사건 후, 새로 부임한 이종률 교육감님께서 도내에서 청렴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았다는 소문이 났다. 그리고 그 실무를 맡은 분이 정대화 중등교육과장이었다. 그는 업무에도 철두철미하여 '교육위원회는 경북교육의 얼굴'이라며 모든 공문서의 양식과 철자법은 물론 회의, 행사 하나하나까지 직접 챙기고 점검하였다.

우리는 과장실에 결재 받으러 갈 때 철자법과 관련 규정을 완전 숙지하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준비해도 과장님이 붉은 색으로 고친 부분이 원문보다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기로 공부를 더 많이 했다. 결국 과장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우리는 그의 깨끗하고 성의 있는 공무원의 자세를 본받으려 했다. 과장님은 차 한 잔도 대접할 수 없다. 선물을 보내면 즉시 반환한다. 그때는 모두 단독 주택이어서 집 찾기가 힘들었는데 물건 반환에 사모님의 수고가 컸다.

내가 부임하던 그해 추석 전날, 김모 견모 장학사와 셋이서 과장님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쇠고기 세 근을 사서 따로따로 한 근씩 쌌다. 그리고 그 포장지에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집에 들어가니 첫마디가 "왜 오셨어요?, 그것이 무엇이오?" 하시기에 이 주소로 집집이 반송하면 됩니다. 하니 아무 말씀을 못하신다. 너무 당돌하고 장난 끼가 섞인 우리의 만용에 그것을 되돌리지 못했다. 우리는 난공불락의 고지를 점령한 듯 과장님 댁의 음식과 술을 다 비우고 돌아왔다.

중등교육과는 정말 일이 많았다. 당시는 모든 업무가 수작업이었고 대구가 포함된 경북의 교원 수는 2만 여 명이나 되었다. 정보부에서 이름만 건네주며 소속 거주지를 찾아내라고 하면 그 많은 인사기록 카드를 다 찾아야 했다. 그때가 재건 국민운동을 하던 시절이라 업무는 폭주하고, 모든 일은 항상 분초를 다투었다. 새마을 업무와 관련된 교육 인원 차출이 너무 빈번하여 가끔 인원을 빠뜨려 혼이 나기도 했다. 뿐인가 통신 수단이 미약해서 대부분 현장 방문을 해야 했고, 서울 본부에 직접 찾아가서 지침을 받거나 물품을 수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교육의 외형적 실적은 크지 않았으나 학생들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불어넣어주고, 불퇴전의 용기를 북돋우어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중등교육과 장학사가 때때로 노무자 노릇도 했다.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다 하지 못해 서류를 보자기에 싸들고 출퇴근 했는데 보자기는 일하던 서류를 그대로 싸서 옮길 수 있어 아주 편리했다. 그때 긴급회의는 왜 그리 많았던지, 무슨 행사를 하면 항상 의자가 부족하여 1, 2층에 있는 각 과장실의 응접 의자를 4층이나 별관 회의실로 등에 지고 옮겨야 했다. 장학사 대부분은 나이가 많고, 몸은 약해서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중등교육과는 권위가 있었다. 청렴하고 업무에 정성을 다하는 과장님이 계셨고, 노무자 같은 일도 서슴지 않고 함께 하는 장학사들이 있어, 대구시와 24개 시·군의 교육계를 거뜬히 장악할 수 있었다.

김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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