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프로야구 25주년을 기념해 프로야구 포지션별 올드스타 인터넷 인기 투표를 실시한 결과 이만수가 2만 8천62표를 얻어 전체 최다 득표자가 됐다. 역대 프로 야구 기라성 같은 선수들 중 최고의 선수, '별 중의 별'로 선정된 것이다. 인터넷 투표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만수가 최고 스타로 선정된 데는 이설이 없었다. 그만큼 출중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학을 거쳐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삼성라이온즈에 몸담은 이만수는 1997년 은퇴할 때까지 스타의 반열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1970년대 대구 학생 야구의 전성기 중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핵심 선수였고, 1977년부터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까지 청소년 국가대표와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의 주축이었다.
○…이만수는 아마추어 시절의 활약상도 대단하지만, 그는 프로야구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오로지 실력만이 돈이 되고 명예가 되고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프로 세계에서 그는 단연 빛나는 프로였다.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개막전 MBC청룡과 삼성라이온즈와의 경기는 연장 10회 말 삼성의 극적 역전패로 끝나는 바람에 굿바이 홈런을 때린 청룡의 이종도가 스타로 등극했지만 내용상의 스타는 이만수였다.
○…이만수는 개막전에서 한국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남을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어서 1983년 MVP를 비롯해 3회 연속 타격왕, 3회 연속 홈런왕, 타점왕 3회 등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특히 1984년 기록한 타격 3관왕(타율'홈런'타점)은 프로야구 최초이자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이대호 선수가 24년 만에 타격 삼관왕에 오르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이만수가 SK와이번스의 수석코치로 귀국한다는 소식이다. 1999년 홀연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트리플 A팀 객원코치로 떠나 2005년 화이트삭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불펜코치로 A급 공신이 된 그다. '수돗물 틀어놓고 많이 울기도 했던' 그는 결국 미국서도 해냈다. 철저한 프로이면서 가장 프로답지 않아 보이는 그의 담백한 스타일을 팬들은 사랑한다. 몇 년 전 귀국했을 때 그는 삼성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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