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은 유학으로 다진 풍부한 교양과 서예의 붓놀림(筆線)을 기초로 사군자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의 문인화를 통해 예스럽고 소박한 정신세계를 표현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인화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생동하는 선의 기법과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식입니다.
199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죽(竹)'으로 대상을 수상한 문인화가 석경(石鏡) 이원동(48) 화백. 오랜 서예수련으로 운필의 속도와 농담(濃淡)을 의지대로 구사할 수 있는 필력을 갖췄으며, 문인화의 정체성을 확고히 알고 이를 구현하기위해 고뇌하는 그를 대봉칼국수집에서 만나 선비 정신의 발현인 문인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려서 회화에 관심이 있어 미대 진학을 꿈꾸던 중 고교 은사인 박근술 선생님을 만나면서 문인화에 입문하게 됐고 그 첫 인연을 시점으로 어언 30여 년이 흘렀네요."
어느 작가이든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구성하기위해 일반적으로 습작기-대상관찰능력 배양과 사실적 표현기- 사물의 재구성과 추상성 강조기로 발전한다고 가정했을 때 30여 년의 세월은 작가로 하여금 완숙기로 접어들기에 충분한 시간인 듯싶다.
"틈틈이 불교경전을 포함한 한문 공부에 힘을 쏟습니다. 문인화란 회화성도 중요하지만 화폭의 일부를 차지하는 글씨, 즉 화제(畵題)도 중요합니다."
그는 한시와 한글시도 짓는다. 유학적 덕목을 강조하는 문인화에서 회화성과 화제는 불가분의 관계. 회화에 걸맞은 화제가 따라야 전체적인 작품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 문인화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화백은 그림과 화제 모두에서 나름의 경지를 이룬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문인화는 붓을 들어 사물을 표현하는 기초단계부터 추상성이 강조된다. 생활환경, 작가의 경험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삶의 사건들을 보고 느낀 뒤 실재 뒤에 숨어있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문인화의 소재인 셈이다.
"해가 뜰 무렵 창령 우포늪가에 앉아 수면을 바라보세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물안개를 뚫어져라 보고 있노라면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이 투영되면서 여러 차례 반성의 계기가 이뤄집니다. 이 때가 되면 좀 전에 본 우포늪은 더 이상 단순한 늪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 드러난 또 다른 늪의 모습인 형외지상(形外之像)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화선지에 옮겨지는 거지요."
이 화백에 따르면 이러한 형외지상은 문인화의 참된 멋이다. 하지만 문인화를 감상할 때는 작가의 이런 의도성이 오히려 벽이 될 수도 있다. 그저 감상자가 지닌 교양수준에서 솔직하게 그림에 접근하라고 충고한다.
"초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매 순간순간과 화법의 기능을 익혀가는 정도에 환희심을 가져야지 공모전이나 수상에 먼저 뜻을 둔다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의식이 명징한 아침이면 그는 대나무를 즐겨 그린다. 사군자 중 하나인 대나무는 줄기를 치는 가운데 전서의 법을, 마디를 긋는 가운데 예서의 법을, 가지를 뻗는 가운데 행서의 법을, 잎을 틔우는 가운데 해서의 법을 익히기에 가장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마음의 걸림이 없이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문인화를 그릴 준비는 다 된 것. 그 다음은 마음 가는대로 붓을 운용할 따름이다.
"자신의 세계관이 뚜렷하고 기법만 익힌다면 문인화를 매개로 자적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의 화실(011-810-7598)에서는 초심자들에게 한자서예와 사군자를 함께 익히게 한다. 한국문인화협회와 한국미술협회 문인화분과 산파역을 하기도 했던 이 화백은 근대 문인화가 석재 서병오 선생과 중국 청조화가 포작영의 화풍을 사숙(私淑·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따름)하고 있다.
◇대봉칼국수
돼지고기 수육과 채식을 즐기며 소식을 원칙으로 삼는 이원동 화백의 20년 단골집인 대봉칼국수는 화실과도 가깝거니와 칼국수와 보리밥차림이 시골고향집 맛을 그대로 담고 있는 집으로 유명하다.
보리와 밀은 서재에서 직접 재배한 것을 이용하고 찬으로 곁들이는 배추겉절이와 부추, 열무김치도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을 쓴다. 특히 된장찌개는 색깔부터 짙은 갈색을 띠고 있어 토속성이 강하다. 밀 향기가 그대로 배어나는 칼국수도 그 옛날 고향집에서 먹었던 향수를 자극할 정도이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내부도 초라하면서 정감이 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재개발지역에 들어 있어 10월 말 경이면 문을 닫게 된다는 것. 대구 중구 대봉동 삼익아파트 뒤편 골목에 가면 이 집의 작은 간판을 볼 수 있다.
문의:053)424-4343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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