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추석의 현대적인 귀소심리

오늘날 산업화·도시화·기계화사회에서 우리 한국인은 역사상 가장 자연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나 않을까. 계절은 옛날처럼 변함없이 오고 가지만, 현대인들은 그것을 계절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둔화될 대로 둔화되어 버렸다.

길가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자연의 섭리를 되새겨 보는 여유를 갖기 보다는 연료걱정과 김장걱정을 한다. 오늘날 한국인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쇠약증에 걸려있어 현대문명의 먹구름 속에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옛 선조들이 일년 열 두달 다달이 서너 개씩의 세시행사를 누렸던 것은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 둘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이 구정과 추석 두 명절 뿐이 아닌가.

전통적인 것이면 무작정 후진적인 것이어서 하루바삐 버려야 한다는 이상한 근대화의 논리에 세시행사가 온통 유린되어 왔다. 그 전통학살 시대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온 추석. 지난주 추석을 보내며 자연과 인간의 융점인 세시행사를 난도질한 근대화의 논리에 대한 반성을 해보았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주체회복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화할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자연회복과 인간회복의 차원에서도 세시행사의 부활을 촉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추석은 비단 격리되어 멀어져 가는 자연과 인간과의 사이를 결속시키는 수단 만이 아니다.

귀성이라는 민족대이동으로 헤어졌던 가족·혈연·친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동성의 유목민족이나 상업민족은 떠나가 사는 곳이 고향이지만, 정착성의 농경민족은 귀소성이 강하다. 평생 외지에서 살다 죽는다 해도 귀향의식은 강렬하게 살아남기 마련이다.

근대화가 이 정착성의 기반을 흩어놓았지만 추석이 이를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접합시켜 준다. 만약 이같은 접합기회가 없다면, 우리 한국인은 더욱 각박하고 메마르고 고독한 세상을 살아 가야 할 것이다.

옛 한국인들이 그토록 가난하면서도 각박하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이 가족·혈연·친지간의 끈끈한 정 때문이었다. 정이라는 이 흐뭇한 인간 윤활유를 공급해 주는 유도관으로서의 추석의 의미 확인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추석은 또 성묘라는 수단으로 인해 죽은 자와 살아있는 만남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뿌리에 대한 감사의 기회를 제공한다. 숭조사상은 죽은 후의 자신을 연상한다는 시각에서 막스웨버는 종교로 정의를 짓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동양인이라고 말했을 만큼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만남에 현대적인 가치평가를 하고 있다. 추석은 또 연중 가장 규모가 큰 도농(都農)의 만남이란 점에서 사회적·경제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 도농의 만남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도시의 돈이 농촌으로 대폭 유출되는 도농 경제유통이다. 돈 뿐만이 아니다. 도시의 문화나 정보가 농촌으로 흘러가는 가장 밀도 높은 교류가 이 명절에 이루어진다.

비단 도농뿐아니라 각 지방에서 모여든 친지들에 의해 지역 간의 횡적인 교류도 이뤄진다. 따라서 도농격차를 다소 완충시키는 기능을 추석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대이동은 곧 민족대교류인 것이다.

다만 이 교류의 부정적인 면도 적지않다. 건실하지 못한 도시의 유행을 농촌에 이입시켜 농촌의 건강을 해치고 낭비를 조장하는 것이며, 또 가뜩이나 이농에 들떠있는 젊은 농촌인력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이 추석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 가족이나 친족·친지와의 만남, 조상과의 만남 그리고 도농간의 경제·사회·문화·정보의 만남 등 마냥 서로가 등지고 배반하고 반대쪽으로만 치닫는 외향성의 시대에서 서로가 방향을 바꿔 접근하는 내향성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돼야 한다.

한국인은 자연에 귀의하고 동시에 자연을 인간세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자연과 동화해 살아왔다. 한국인의 한국인다운 인자로서 이 자연과 인간의 융점인 추석 명절의 이해는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장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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