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중도(中道)의 시절인가!

근자에 '중도(中道)'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중도 좌파니 중도 우파니, 또는 중도 진보니 중도 보수니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또 당내 중도파라는 말도 흔히 듣는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중도라는 말이 그렇게 마구 쓰일 수 있는 말일까? 그렇게 쓰여져도 좋은 말일까? 중도(中道)의 그 본래적 의미는, 마치 화살이 과녁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듯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도(道)에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 가야할 길, 인간이 지켜야 할 순리와 법도에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도(中道)는 그런 게 아니다. 도(道)와는 애당초 상관이 없다. 이것과 저것의 사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어중간한 지점, 타협의 지점을 의미한다. 이것과 저것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이것에도 통하고 저것에도 통할 수 있는 샛길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중도라는 것은 당파적 세력을 규합하고 잡다한 당파적 이해관계를 규합하는데 편리한 기회주의적 개념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해방정국의 지도자였던 김구나 김규식은, 좌우의 한 가운데에서, 남북의 한 가운데서 중도를 고민했었다. 그들은 민족을 통째로 끌어안고 고민한 사람들이었기에 중도를 말할 자격이 있다. 그들은 정파적 이익과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중도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대인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로 6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정치판에는 대도(大道)를 가는 그런 대인(大人)이 없다. 길이면 가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지도자가 없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길이라도 가지 않고 길이 아니라도 간다. 당리당략과 자신의 계산에 맞으면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을 것이다. 길이 아니라도 자신에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샛길이든 옆길이든 어거지로 길을 만드는데는 이력이 나 있다.

오늘날의 중도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말인즉 중도를 말하지만, 정말 사회적 대의를 위해서 당리 당략과 정파를 뛰어넘고자 하는 중도가 있는가? 가야할 길이면 그 길에서 끝낸다는 그런 지조를 가진 중도가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정파를 뛰어 넘고자 중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파적 이익을 규합하고자 중도를 말하는 것 아닌가?

중도 보수, 중도 진보 또는 중도 개혁이 하는 말 자체가 그렇다. 당파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당파적 중도를 주장한다는 것이니 궁색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당파와 중도라는 것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개념이다. 당파적 중도라는 것은 자기 모순적 개념이다. 이러한 자기 모순적 개념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중도적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정말 한 가운데라도 서겠다면 그래도 중도를 말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중도라는 것은 그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원칙이 없다. 무원칙의 이름이 중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원칙이 있다면, 권력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고 표만 되면 언제든 잡탕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도의 원칙이라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그외 달리 무슨 원칙이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중도는 또 하나의 당파를 만드는 구실이상의 의미가 있었던가?

이제 허망한 중도(中道) 놀음, 또 다른 당파를 만드는 중도놀음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철따라 무늬만 바뀌고 이합집산하는 중도에 기대를 걸 사람도 없다. 중도를 표방하면 표심(標心)을 잡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그런 중도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놀음에도 이제는 지쳤다. 국민들은 당파간의 소모적 당쟁에도 질렸고 또 더 달라질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중도의 놀음에도 지쳤다.

물론 그렇다. 오늘과 같은 혼돈과 위기의 시절에 민족적 생존과 이 나라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중도(中道), 쪼잔한 중도가 아니라 대승적인 중도가 출현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권력에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대승적인 중도에 올인하는 대인(大人)의 출현을 우리는 고대한다. 과연 우리 정치를 구원할 희망의 중도가 싹틀 날이 있을까? 그날이 언제일까?

배영순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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