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 (16)보람 있었던 마지막 학교

대구여고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매월 실시하는 3학년의 모의고사 성적은 대구시내 15개 여고 중 14위 또는 15위였다. 이런 성적이 공개되니 선생님들은 모의고사 공포증에 걸리고 1, 2학년은 모의고사를 아예 응시하지도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매년 이런 상황이 누적되니 자포자기 상태가 되고 이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혁명에 가까운 대개혁이 일어나야 하며 타성에 젖어 있는 구성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면 오히려 거기 동화되기 쉬우므로 획기적 개선 방안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입학 당시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그동안의 모의고사 리스트를 분석해 보니 입학해서는 대구시내에서 상위권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위권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특히 과목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지도교사의 학습지도 능력에 따라 성적이 좌우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성적을 공개하기 위해서 신문지 크기의 용지에 매월 실시하는 대구 시내 남·여 3학년 모의고사 일람표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학교별·월별 석차, 과목별 점수, 총점도수분포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일람표만 보면 우리 학교의 어느 과목, 어느 교사의 지도 결과가 타 학교와 비교하여 어느 수준인가를 바로 알 수 있게 했다.

이 일람표 원본은 대구여고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고, 복사 분을 내가 몇 부 가지고 있다. 이 일람표 외에 '과목별 문항별, 학생들의 반영 비율표'가 있다. 이것으로 매달 모든 과목의 문항 하나하나에 대해서 교장과 같이 분석했다. 여기서는 변명도 나오고 반성도 나오고 고함소리도 나왔다. 나는 일요일에도 출근했지만 교내를 일체 순회하지 않고 교장실에서 선생님들보다 앞서 과목별 문항별 반영 상태를 분석하여 담임선생님에게 자료를 제공했다. 그리고 월별 학생 개인별 성적 일람표도 전 학생 것을 내가 작성하여 담임선생님들의 부담을 들어드렸다.

어느 일요일 운동장에 많은 학생들이 쉬고 있었다. 내용을 알아보니 문제 분석 결과 성적이 부진한 과목은 일요일에도 수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희망자가 너무 많아 그 시간을 얻기가 아주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일요일' 수업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3학년 주임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말도 돌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다. 3월에 12위였던 것이 4월에는 6위.....마지막 모의고사인 88년 11월 4일에는 대구시내 여고 중에서 1위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생도, 선생님도, 동창도, 학부모님도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동인 호텔에서 선생님들에게 위로 연회를 열었다. 나는 "돈 걱정 마시고, 얼마든지 잡수세요!" 하고 흥을 돋우었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지금도 당시 근무했던 선생님들의 모임인 구정회에서는 한 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돈 쌨다, 막 먹어라."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쓴다. 그때 그 선생님들은 지금도 대구여고에 몸담았던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높은 긍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학교 현장의 교편생활이 이 학교에서 끝맺을 줄 몰랐다. 평소에 나의 고향이요 나의 모교인 경북 선산고등학교에서 교직을 마감하려고 결심했는데 대구여고가 마지막 학교가 될 줄이야. 대구여고는 나의 일생 중 가장 보람 있었던 학교가 되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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