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은빛 파도의 물결…화왕산 '억새 여행'

가을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은빛일 터다. 햇살을 받아 눈 뜨기가 어려울 정도로 반짝이는 억새밭처럼. 보송보송한 솜털같은 부드러움으로 산 능선을 뒤덮은 억새. 지금 그런 억새가 한창이다. 억새가 가득한 능선에선 은빛 가을바람을 타고 파도가 인다. 그 파도를 따라 가을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만으로는 메마르다. 하지만 억새밭에 서면 어지간히 무딘 사람도 가을을 보고 들을 수 있다.

밀양의 사자평, 정선의 민둥산, 제주의 오름…. 전국에 억새명소는 많다. 하지만 아무래도 창녕의 화왕산만하지는 못하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억새의 크기도 그렇지만 화왕산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오목한 6만여평 대규모 분지가 온통 하얀 억새꽃으로 뒤덮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녕여중 쪽에서 출발, 환장고개를 넘어 올라선 화왕산. 밋밋하다. 억새가 가득하지만 뭔가 빠진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억새는 역광으로 보라고 했다. 아직 오전 10시가 안된 오전. 왼쪽의 화왕산 정상 대신 해를 안고 가는 오른쪽 배바위 쪽으로 향한다. 역광에 하얗게 반짝이는 억새밭. 가을단풍이 컬러사진이라면 억새는 흑백사진이다. 배경으로 깔린 푸른 하늘을 빼면 온통 하얀빛 뿐이다.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한 아름다움이다.

이맘때 제주도의 억새를 생각한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길 양쪽 곳곳에 솟아오른 언덕에 듬성듬성 무리지어 피어있는 제주 억새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이런 은빛 억새도 시간따라 변한다. 점심나절 수수하게 바람따라 움직이기만 하다가 해질녘이면 노을을 품고 금빛 억새로 바뀐다. 은빛 억새가 눈을 찌르는 듯한 반짝임에 눈물이 날 지경이라면 금빛 억새는 황홀하다.

화왕산의 억새는 큰 키가 특징이다. 앞서가던 사람의 모습도 억새에 파묻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해를 안고 은빛 억새를 보며 배바위까지 올랐다면 이젠 산성을 따라 분지를 한바퀴 돌 차례다. 둘레 2.6㎞ 산성을 한바퀴 돌아봐야 화왕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다.이렇게 화왕산 억새밭을 한 바퀴 도는 데는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지난 주말 화왕산의 억새는 하얗게 거의 핀 상태였다. 이번 주말부터는 화왕산 정상 분지를 꽉 메운 황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단 하나 명심할 내용. 억새산행은 시간에 쫓기듯, 마라톤하듯 촉박한 산행으론 묘미를 알 수 없다. 천천히 억새밭에 머물며 여유있는 산행이 어울린다. 이 가을. 흑백사진 같은 은은한 매력이 그립다면 억새밭에 서보라.

박운석기자 dolbb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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