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17·여·가명·고교 2년)이가 전교 1등을 했다. 지난 중간고사에서다. 친구들이 놀라고 선생님들도 입을 벌렸다.
"저 아이가 어떻게?, 무슨 족집게 과외를 받았길래?" 족집게 과외란 소리를 듣고 미진이는 속으로 웃었다.
'기초생활보호대상자'여서 그 흔한 참고서도 자신에게는 사치품인데….
미진이네는 월셋방에 산다. 아빠는 3년전 집을 나가셨다.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며 월 수십만 원을 겨우 받는 지체장애인 엄마. 그리고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남동생 둘. 월세 주고, 쌀 사고, 반찬 사면 미진이 엄마 지갑은 텅텅 빈다. 과외? 학원? 어릴 때부터 미진이의 머릿속에 이런 낱말은 없었다.
아빠가 갑자기 집을 나갔을 때 미진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가게를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왔던 아빠의 가출은 사춘기 어린 소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상위권은 아니지만 중위권은 유지했던 학교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진이네 집에 1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사무소에서 온 연락이었다.
"미진아,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는데 한번 가보지 않을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인데, 어때?"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냥 대답했다. "네!"
'틈세'란 곳이었다. 2001년 경북대 학생들이 만든 '공부 자원봉사 모임'이다. 틈세 언니·오빠들은 미진이를 동생처럼 돌봤다. 미진이도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언니·오빠들과 밤마다 흘린 땀으로 미진이는 마침내 지난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따냈다.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가슴엔 절망이 가득해요. '공부해서 뭐하나, 우리 집엔 돈이 없는데' 이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죠. 여기서 저는 공부도 많이 배웠지만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습니다. 가난해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가난이 비록 불편한 것이지만, 우리의 꿈을 꺾을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거든요."
미진이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것. 몸이 불편한 엄마를 보살피고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하기 위해서는 꼭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미진이는 요즘 또 하나의 결심을 했다. 대학에 가서 '틈세' 같은 곳에서 공부 봉사를 꼭 하겠다는 것. 어려운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지난 4월부터 '틈세'를 찾고 있는 현진(15·여·가명·대구 달서구)이도 이제 희망이라는 글자를 손바닥에 써본다고 했다. 5년전 위암을 앓던 엄마가 떠나고, 3년전엔 아빠까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고모와 함께 살고 있는 현진이는 "이젠 울지 않아요. 공부를 통해 삶의 목표를 찾았거든요."라고 어른스럽게 얘기했다.
미진이와 현진이는 오는 28일 경북대 대강당 무대에도 선다. '틈세'가 마련한 뮤지컬 공연. 미진이는 이 무대에서 가난을 극복한 소녀 역할을 맡는다. 자신의 이야기다. 그래서 미진이는 혼을 담아 연습한다고 했다.
'틈세' 창립멤버인 윤진호(29) 씨는 "가난한 아이들이 희망마저 잃어가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절망의 그림자를 걷어내야하며 이번 공연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이 자신감과 꿈을 향한 열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틈세'는 '틈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뜻으로 현재는 경북대 뿐만 아니라 영남대 등 대구· 경북 4년제 대학생들로 참여가 확대돼 자원봉사 교사만 120여 명이나 된다. 이곳을 거쳐간 청소년들 역시 100여 명을 훌쩍 넘었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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