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추령을 넘어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를 거쳐 동해바다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자동차로 40여 분간을 달리는 짧은 거리지만 이 길에는 호수와 산, 계곡과 구불구불한 고갯길이 끝이 없는 듯 이어지고 강과 들판이 이어지다 넓은 바다가 가슴에 안기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 주변 곳곳은 신라 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동해 가는 길
경주에서 동해바다가 보이는 감포와 문무대왕릉을 가는 길은 어느 계절 가릴 것 없이 아름답지만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길은 더욱 아름다워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덕동호를 끼고 난 국도 4호선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돌고 돌아 정상인 추령을 넘어 동해로 가는 길에는 추령터널이 뚫려 있다. 하지만 시간의 단축과 편안함을 버리고 지금은 차량 통행마저 뜸한 옛길을 따라 가노라면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단풍에 물들어가는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감상할 수 있다.
황룡계곡을 빠져나오면 두 갈래 길에 합쳐지는 장항리다. 이곳에서 함월산과 토함산 동쪽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만나 대종천을 이루고 그 옆으로 그리 넓지 않은 들판들이 펼쳐진다. 마치 황금칠을 한 듯하다. 양북 검문소에서 감포로 가는 국도와 감은사지와 석탑, 그리고 가슴까지 확트일 듯한 봉길리 동해바다가 펼쳐지는 길을 달리는 929번 지방도가 갈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경주에서 봉길리 해변에 이르는 이 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칭송하는 것일까? 아마도 호수와 강, 계곡, 고갯마루, 그리고 들판과 바다. 그리고 역사성이 모두 다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지금처럼 점점 가을이 깊어가며 단풍이 들 무렵 경주를 출발하여 추령을 넘으며 노랗게 물든 길 옆의 잡목들과 어울려 들판의 잘 익은 곡식을 가슴 가득 안고 달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자연이 주는 한 폭의 아름다운 예술로 우리의 가슴에 와 닿기에 충분하다.
◆대종천과 감은사
함월산과 토함산 동쪽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만나 흐르는 대종천은 봉길리 앞바다로 흘러든다. 대종천은 그 옛날 제법 큰 강이었고, 동해 바닷물이 제법 지금의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왔었다는 말들이 있다. 이 강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의 넋이 드나들며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길의 구실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 강이 대종천이라고 이름 붙여진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몽고족들이 황룡사 대종을 배에 싣고 가려다 문무대왕님이 노하여 갑자기 폭풍이 일어 배가 통째로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카더라. 30, 40년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거세게 치거나 하면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났다 카더라. 어떤 머구리(잠수부)들은 물밑에서 종 같은 것을 봤다고 카더라.'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다.
그동안 몇 차례 이 종을 찾아보려는 탐사가 진행됐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조사단을 구성, 봉길리 앞바다에 잠수부를 동원해 수중 탐사를 시도했다가 물밑이 흐리고 장비에 한계를 느껴 며칠 해보다가 포기했었다. 또 1989년에는 미군 비행기가 봉길리 앞바다에 추락했을 때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잠수부 등을 동원해 탐사에 나섰으나 이때도 종을 발견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1997년 4월 황룡사 대종찾기 해군탐사반이 문무대왕릉 인근 바다에서 40일 정도 수중탐사에 나섰으나 이 역시 종의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 이 작전을 참여했던 한 공무원은 "대종을 찾으면 한국에서 열리는 2002년 월드컵 개막식에서 타종할 계획으로 탐사를 했으나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다만 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향토사학가였던 고 최용주 씨는 "우리 토박이들은 마을 앞으로 넓은 강이 흐르면 '큰거랑'이라 불렀다. 대동여지도에 '동해천'이라고 적혀 있는데도 일제가 우리땅을 짓밟으면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고 이후 지도를 만들면서 대천(大川)으로 고치려다 이야기로 전하는 종(鐘)자를 넣어 대종천으로 했다."는 주장을 폈다. 우리의 '동해'를 '일본해'로 굳어지게 하려고 획책하던 그들에게 '동해천'은 어림없는 이름이었다는 주장이다.
대종천을 따라 929번 지방도로 동해로 가다 보면 왼쪽 산 아래로 감은사(感恩寺) 터가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님의 위력을 빌려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절을 세우다가 돌아가시니 아들 신문왕이 완성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삼국 통일 후 고구려의 씩씩한 기상과 백제의 우아한 세련미, 신라의 소박함을 어울러 절을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거대한 두 개의 석탑이 1천300여 년이라는 세월을 이겨내고 서 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기 벅찬 듯 쌍탑 중 서탑은 얼마 전부터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받고 있다. 감은사 탑이여 영원 영원하소서.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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