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말이 없었다.' 22일 별세한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은 결국 '역사의 진실'을 무덤 속으로 까지 짊어지고 갔다.
'10.26'에서 '12.12'와 '5.18'을 거쳐 대통령 하야에 이르는 격동의 정치상황을 놓고 지금까지도 숱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비밀의 열쇠를 쥔 최 전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침묵을 지켰다.
유신체제 하인 1976년 국무총리에 임명된 최 전대통령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출된 뒤 신군부가 주도한 12.12 사태 직후인 같은 달 21일 제10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 5.18 사태 이후 정국은 극도의 혼미상태에 빠져들었고, 최 전 대통령은 결국 그해 8월15일 하야성명을 내고 권좌에서 물러나 헌정사에 '최단명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라 최 전대통령은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불행한 시대의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꼬리표 처럼 따라붙었다.
신군부의 최대 피해자로 간주돼온 최 전대통령은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해 '재임중 사안'이라는 이유로 일체의 공개적 언급이나 진술을 거부해왔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인 1995년 12.12 및 5.18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최 전대통령을 상대로 다각도의 조사로 '입열기'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최 전대통령이 '집념'에 가까울 정도로 침묵을 지키면서 세간에는 갖가지 의문이 제기돼온게 사실이다.
특히 그가 신군부가 자행한 정권탈취 음모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추측도 적지 않았다. 퇴임 이후를 보장받기 위해 민간에 의한 대통령 선출보다는 신군부의 집권을 도운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그가 80년 8월1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난 뒤 전두환(全斗煥)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향해 '지지연설'을 한 것이 최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단순히 신군부의 강압으로 물러났다면 과연 지지연설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추론에서다.
또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 이후 대통령 간선제를 요구하자 최 전대통령측이 개헌일정을 대폭 늘려 잡은 것이나, 전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중앙정보부장 임명을 요구하자 80년 8월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한 것도 석연치 않은 대목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최 전대통령의 별세로 12.12 및 5.18 당시 신군부의 집권과정을 둘러싼 '실체적 진실'은 역사의 미궁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최 전대통령이 '회고록'을 남겨놓았을 가능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최 전 대통령이 거의 집필을 끝낸 뒤 자신의 사후에 공개토록 지시한 '회고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회고록에는 신군부가 각종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가한 유.무형 압력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최 전대통령측은 "회고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고 있다. 최흥순 전대통령 비서실장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회고록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부인했다. 다만 최 실장은 그러나 "개인적 메모는 혹시 있을 지 모르겠다"고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최 전대통령이 집필한 회고록성 비망록이 있지만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그냥 보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란 추정도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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