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에선 대구를 한국출판계의 '샘터'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학원사', '동아출판사', '계몽사', '현암사', '교학사', '사조사', '금성출판사' 등 국내 굴지의 출판사들이 모두 대구에서 둥지를 틀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학원사와 동아출판사, 계몽사, 현암사는 해방 직후 출판의 요람기에 닻을 올려, 한때 한국출판계의 등대역할을 했기에 더욱 그렇다.
학원사의 고 김익달(金益達) 초대사장과 전 동아출판사의 김상문(金相文) 창업사장은 대구 해성초등학교의 동기동창이다. 또 계몽사의 고 김원대(金源大) 사장과 김익달 사장은 해방 직후 대구역 앞 중앙로 입구에서 반 년 넘게 노점책방을 나란히 하며 사업밑천을 장만했던 특이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출판원로들인 이 3김씨들의 인연과 공적을 외면하곤 대구의 출판계는 물론 한국출판계의 요람기와 착근기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해방 전 황해도 해주에서 '낙동서관'이란 서점을 경영한 바 있던 김익달은 해방 후 출판업에 뜻을 두고 대구로 귀향했으나 사업자금이 달렸다.
길가에서 노점책방을 하며 밑천을 마련하던 중, 유행가 가사를 찾는 고객이 많음에 착안, 프린트로 된 '걸작 유행가요집'을 내면서 출판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의 가요집은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유사품과는 달리, 가사 옆에 삽화를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었다. 이 차별화한 가요집이 히트를 쳐, 1부에 이어 2부, 3부까지 내놓아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옛 서점 이름에서 딴 낙동서관이란 출판사 상호 아래, '시조백선', '중등지리', '중등작문학습서', '수학강의' 등을 출판하는 족족 히트를 쳤다. 1947년 서울로 진출해 '대양출판사'를 열었지만, 6·25 피란시절 대구에서 '학원'잡지를 발행한 이후 출판계에서 그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해방 전후 대구에서 등사판으로 시작한 김상문의 출판역사는 친구인 김익달과 맞수로 경쟁하면서 사세를 키워갔다. 등사판으로 된 초등학교 국어책을 납품해서 든든한 출판자본을 마련했던 그는 46년 한 해 동안 '초등상식' '상식문답집' '국어셈본실력문제집' 등의 베스트셀러를 연달아 내며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그 역시 서울 진출 직후 6·25로 큰 손실을 입고 수복 후에야 동아출판사로 재출발, '중학입시예상집'으로 큰돈을 벌고, 한때 '출판황제'란 소리까지 듣게 된다.
노점에서 책과 신문을 팔아 6만 원의 사업밑천을 마련한 김원대는 1946년 대구 포정동에 계몽사란 서점을 내면서 출판과 인연을 쌓는다. 이듬해 출판사 등록을 겸한 그는 47년 이설주(李雪舟)시인의 시집 '방랑기'를 처음 발행했다. 그렇지만 그의 진가는 무엇보다 오랜 서점경영에서 얻은 판매노하우에서 발휘되었다. 전쟁 후 아동도서전문 출판사로 방향을 잡으면서 그만의 독특한 판매조직을 통해 사세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상원(趙相元) 사장은 해방되던 해 연말에 '건국공론'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하면서 출판업과 인연을 맺는다. 주간신문 '민론(民論)'도 함께 발행하던 그는 6·25 피란시절부터 자신의 호가 된 현암사(玄岩社)를 차려 '법전'등 법률서적을 기반으로 출판업계에 두각을 나타낸다. 김익달·김원기·조상원은 고인이 되었고, 김상문은 올해 91세로 노익장의 현역으로 살지만 피와 땀이 어린 회사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창업보다 수성(守成)이 어렵고, 수성보다 대물림이 더 어려운 게 기업, 특히 출판계의 실상이다. 또 문화사업이란 어차피 금전보다 '문화'를 남기고 가는 사업일 바에야, 다 털고 빈손으로 간들 부끄러움도, 흉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출판황제' 김상문이 미수(米壽)에 펴 낸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 자서전은 출판업계의 진솔한 고백 같아 한결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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