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교육청은 서울대학교 합격 저조에 대한 질책을 많이 받았다. 1993년과 1994년 국정감사에서 서울대 합격 저조에 대한 이유 및 대책을 추궁당했다. 93년 1월 5일자 조선일보와 같은 날 매일신문에서는 대구, 경북의 서울대 합격 저조와 대책이 시급하고, 인재를 기를 줄 모른다고 질책했다. MBC와 영남일보에서도 농사 망쳤다는 말과 이러고도 교육 도시인가 하고 개탄했다. 대구 인구의 반도 안 되는 광주가 93년에 307명을 합격시켰는데 대구는 199명밖에 합격시키지 못했다. 전국 8위다. 94년에는 광주가 368명, 대구는 221명을 겨우 합격시켰다. 이렇게 성적 차가 나는 이면에는 광주 택시들이 인문계 고등학교 부근에서는 클랙슨도 울리지 않을 정도로 시민 모두의 협조와 격려가 컸기 때문이다.
나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많은 의견이 나왔으나 만족할 만한 대책은 없었다. 결국 경쟁의식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학교의 명예, 교원 학생들의 자존심이 일시적으로 상하겠지만 학교 성적을 공개하기로 했다. 교육청 전문직 전원이 반대하고 교장 선생님들도 반대했지만 나는 그것을 강행했다. 내가 직접 '94 서울대 합격자 수 일람표'를 작성, 기자실에 가서 공개했다. 기자들도 당황해 했고, 직원들은 큰일 났다고 야단이었다. 이튿날 학교는 희비가 엇갈렸다. 학부모들은 기대 이하의 성적에 실망했고, 동창들도 학교를 방문하여 항의했다. 학교 간 차이도 커 한 남자 사립고가 30명을 합격시켰는데 명문 공립 남자고 4개교를 합해도 15명밖에 안 되었다.
나는 밤에도 학교를 암암리에 순회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지도 격려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교는 복도를 지나가도 자율 학습에 몰입하여 누가 왔는지를 모르는데, 성적이 저조한 학교는 현관에 들어서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서문 시장 같았다. 학교 차가 너무 심했다. 잘하는 학교는 교무실에 가서 격려를 했으나 그렇지 않은 학교는 이튿날 교장선생님을 교육감실에 모시고 강력하게 부탁을 했다. 또 진학지도 주임을 한자리에 모시고 소주잔을 나누면서 위로도 하고 부탁도 드렸다. 때로 일대일로 마시다 보면 40, 50잔을 마셔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서 모든 학교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매년 성적이 조금씩 향상되더니 96년부터 상위권으로 진입했다. 1위는 서울, 2위는 대구로 424명, 부산은 3위로 377명, 광주는 4위로 317명이었다. 97년에도 대구가 2위로 434명을, 부산이 3위로 366명, 98년에도 대구가 2위로 476명, 99년에도 대구가 2위로 477명, 2000년에는 대구가 2위로 527명, 부산 3위 411명, 광주는 6위로 218명이었다. 서울은 학생 인구가 워낙 많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뿐 아니라 문교부 주최 제1회 시·도 교육청 평가에서 대구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대구 교육은 학력뿐 아니라 종합적인 교육 활동에서도 크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좋은 성적 뒤에는 학교 선생님, 학부모님 그리고 시민들의 협조가 컸다. 특히 언론의 격려와 협조는 매우 컸다. 93년 12월 3일자 매일신문 수암 칼럼에 '대구1두 4040과 광주 택시'라는 제목으로 교육감의 밤낮 없는 학교 방문과 광주의 택시 기사까지의 협조를 예로 들면서 교육계와 시민사회에 학력 향상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협조와 격려가 없었으면 학력 향상의 기적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고 수준 높은 대구 시민이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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