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대통령 최규하

22일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이듬해 5.18 사태로 대변되는 신군부의 집권으로 8개월여 만에 하야,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중앙무대 뒤로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다.

◆최규하는 누구?=아호가 현석(玄石)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경성 제1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마친 뒤 만주국립대동학원을 졸업했다.

최 전 대통령은 해방되던 해인 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임용됐으나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관직생활에 첫 발을 디딘 뒤 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52년 주일 대표부 총영사, 59년 주일 대표부 공사 및 외무부 차관,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고문, 64년 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67년 제 14대 외무부장관(67∼71년)에 기용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돼 72년 11월과 73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다.

국제회의 참석만도 67년 22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를 비롯, 30여 회에 이를 정도로 한국 외교에 큰 족적을 남긴 역대 최고의 외교관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최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75년 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돼 79년까지 4년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했으며 79년 10·26 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랐다.

곧이어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에 피선됐으며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주도한 신군부의 12·12 사태 직후인 같은 달 21일 제 10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권한대행 시절인 80년 헌법개정, 81년 상반기 대통령 선거, 81년 6월 정권이양 등의 정치일정을 제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한 데 이어 취임 직후인 80년 2 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 시국관련자 687명을 사면·복권하는 등 잇따른 전향적 조치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중심이 돼 5·18 사태가 터지는 등 혼돈의 회오리가 계속되면서 10·26 사태 이후'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그해 8월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4공화국에서 5공화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진공상태에서 대통령직에 올랐다 결국 신군부에 떠밀려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 8개월이 채 안되는 대통령직을 마감한 셈이다.

최 전 대통령은 81년 4월부터 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91∼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70년 일등수교 훈장, 71년 수교훈장 광화대장, 79년 무궁화대훈장, 8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국내훈장과 타이정부로부터 받은 백상최고 기사대장 등 10여 종의 외국훈장을 받았다.

역대 대통령 서거는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1∼3대.65년), 박정희 전 대통령(5∼9대.79년),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4대.90년)에 이어 4번째이다. 그는 하와이 망명생활 중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부하의 총탄에 숨을 거둔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달리 천수를 누렸지만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최단명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홀홀히 사라졌다. 격동의 시기, 신군부와의 악연도 무덤 속으로까지 짊어진 채다.

◆가슴 속에 묻고 가다='끝내 말이 없었다.'22일 별세한 최 전 대통령은 결국'역사의 진실'을 무덤 속으로 까지 짊어지고 갔다.'10.26'에서'12.12'와'5.18'을 거쳐 대통령 하야에 이르는 격동의 정치상황을 놓고 지금까지도 숱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비밀의 열쇠를 쥔 최 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침묵을 지켰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강압에 못 이겨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불행한 시대의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신군부의 최대 피해자로 간주돼온 최 전 대통령은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해'재임중 사안'이라는 이유로 일체의 공개적 언급이나 진술을 거부해 왔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12·12 및 5·18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최 전 대통령을 상대로 다각도의 조사로'입열기'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최 전 대통령이'집념'에 가까울 정도로 침묵을 지키면서 세간에는 갖가지 의문이 제기돼 온 게 사실이다.

특히 그가 신군부가 자행한 정권탈취 음모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추측도 적지 않았다. 퇴임 이후를 보장받기 위해 민간에 의한 대통령 선출보다는 신군부의 집권을 도운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 그가 80년 8월1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난 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향해'지지연설'을 한 것이 최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단순히 신군부의 강압으로 물러났다면 과연 지지연설을 할 수 있었겠느냐는 추론에서다.

또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 이후 대통령 간선제를 요구하자 최 전 대통령 측이 개헌일정을 대폭 늘려 잡은 것이나, 전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중앙정보부장 임명을 요구하자 80년 8월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한 것도 석연치 않은 대목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의 별세로 12·12 및 5·18 당시 신군부의 집권과정을 둘러싼'실체적 진실'은 역사의 미궁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회고록, 있을까?=정치권에서는 최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남겨놓았을 가능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최 전 대통령이 거의 집필을 끝낸 뒤 자신의 사후에 공개토록 지시한 '회고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회고록에는 신군부가 각종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가한 유·무형 압력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최 전 대통령 측은"회고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고 있다. 최흥순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회고록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부인했으나"개인적 메모는 혹시 있을 지 모르겠다."고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최 전 대통령이 집필한 회고록성 비망록이 있지만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그냥 보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란 추정도 나온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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