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연탄

한 차례 비가 온 뒤 가을 더위가 싹 사라졌다. 행인들의 차림새도 갑자기 도타워졌다. 하긴 11월이 코앞이다. 서민들에겐 겨울날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연탄 소비가 급증할 전망이다. 치솟는 高油價(고유가)에 경기 寒波(한파)로 기름보일러는 감당이 불감당일 판이다. 그래선지 추위가 오기 전에 미리 연탄을 사두려는 소비자들로 요즘 연탄공장들은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한다.

○…88세로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대통령은 아니었다.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에 대통령에 올랐고, 재임 10개월 만에 하야함으로써 '최단명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재임 기간의 업적 평가, 그리고 '12'12'와 '5'18'의 진실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문 데 대한 논란 뜨겁다.

○…그러나 세간의 정치적 평가는 차치하고 최 전 대통령이 일반 民草(민초)들도 놀랄 만큼 검소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부패 스캔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어져 나오던 다른 대통령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점이다. 집권 과정이나 집권 기간 등이 다른 대통령과는 다르기도 했지만 본인 자체가 워낙 검소한 성품이었다.

○…2004년 작고한 부인과 40년 동안 2층짜리 자그마한 단독 주택에서 살았으며, 그 응접실에는 50여 년 된 선풍기가 있다. 연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총리시절인 1979년 1차 석유파동 때 장성탄광의 막장에 가서 고생하는 광원들을 격려한 뒤 약속했다 "그들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최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최광수 전 외무장관은 "그 약속은 지금도 서교동 사저의 연탄 화구에서 피어나고 있다"고 회고했다.

○…300원 내외 연탄 1장은 최고 12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다. 갈아넣는 불편함 외엔 이만큼 경제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반질반질 윤나는 연탄 몇백 장만 쌓아두어도 부자라도 된 듯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돼지갈비는 연탄 화덕에 구워야 제맛이 나고, 바깥이 아무리 추워도 연탄난로 위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는 따뜻하고 평화롭다. 또 한 시대가 떠나가고 있다. 이 가을엔 연탄이 새삼 각별하게 와닿는다. 왠지 미안한 느낌도 함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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