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나무들의 편지

나수목 할아버지는 30년이 넘도록 틈만 나면 도시락을 싸들고 나무를 찾아, 나무를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나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과 사는 곳을 하나하나 밝혀, 주목등록부(住木登錄簿)를 만들어 관리하고 계십니다. 할머니와 자식들이 돈도 안 되는 일 제발 그만 두시라고 매달려도,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고, '우매한 인간들이 철이 들어 너희 나무들의 소중함을 알 때까지 제발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고 주문을 외며, 오늘도 새로 주목등록부에 올릴 나무들의 이름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남해 금산 화강편마암 사이에 선 굴피나무, 노린재나무, 나도밤나무, 팽나무, 광나무…

-예산 덕숭산 수덕사 뒷 능성을 오르는 사람주나무, 말채나무, 말발도리, 졸참나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주변의 왕대나무, 산초나무, 덜꿩나무, 산뽕나무, 나귀나무…

-영암 월출산 천왕봉을 오르는 동백나무, 고추나무, 함박꽃나무, 아그배나무, 풍게나무…

-홍천강 팔봉산 기슭에 사는 복자기나무, 고로쇠나무, 들메나무, 누리장나무, 조록싸리…

-운두령 능선을 따라 하늘을 오르는 정금나무, 분비나무, 시닥나무, 참회나무, 귀릉나무…

-선암사에서 비로암으로 가는 길에 청미래나무, 자귀나무, 참회나무, 굴참나무, 돌배나무…

-통영 앞바다 사량도에 사는 사스레피나무, 막삭줄, 곰솔, 감태나무, 덩굴사철나무…

-신제주 삼무공원에 늘어선 댕강나무, 꽝꽝나무, 아왜나무, 멀구슬나무, 예덕나무…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요즘 할아버지 앞으로 전국 각지의 나무들한테서 하루에도 수십 통씩 편지가 오는데, 그 편지의 대부분이 '어디어디에 사는 무슨 무슨 나무가 오염된 지하수에 뿌리가 썩어 죽고, 공사장의 포크레인 이빨에 찍혀 죽고, 가로등 불빛 때문에 잠을 못 자 시들시들 말라 죽었으니 주목등록부에서 삭제해 주십시오.' 라는 부고장이랍니다. 그래서 편지 봉투를 뜯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나무껍질 같은 손을 덜덜 떨며 한숨부터 푹푹 내쉽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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