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 동해구와 대왕암

'길은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길은 길이 아닌 곳과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경주와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를 잇는다. 이 한도막 지방도로는 바다를 향한 7세기 신라의 인후(咽喉·목구멍)이며, 인간의 꿈의 힘으로 살육의 피를 씻어낸 신라의 지성소(至聖所)이다'.(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

◇이견대와 동해구

경주시내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달리다 양북 어일리에서 갈라져 감은사지 앞으로 난 지방도 929번을 따라 가면 동해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은 울산∼포항 31호선과 연결된다.

두 길이 만나는 곳에서 수백m 북쪽 도로변 대본초교 맞은편에 이견대(利見臺)가 세워져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신문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지은 이견정(利見亭)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혼이 깃든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정자에서 동남쪽으로 보면 대왕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축조했다. 이견대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큰 이득을 얻었다는 곳이며,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는 전설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 뒤 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에 이견대를 짓고 역대 왕들이 문무왕릉을 참배하였다고 하니 이곳 이견정에서 대왕암을 바라보는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실제 이견대 터는 대본초교 뒷산으로 150m쯤 올라가면 감은사지와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터라고 주장하는 사학자들도 있다.

감은사와 대왕암이 갈리지는 길목 도로변에 '신라의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황수영 박사는 "동해구를 문무대왕릉을 중심으로 감은사, 이견대, 만파식적이 유기적으로 연관된 신라 김씨왕가의 공동능역이자 신라의 호국성역"이라고 했다.

이 표지석 아래로 몇m 내려가면 은어고기가 많이 잡혔던 민물인 대종천과 동해바다 봉길리 해변이 만난다. 이곳에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년)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85년 황수영 박사 등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비(碑)가 세워져 있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업을 찾아…동해의 대왕암을 보러 가라."고 했던 우현 선생 유지를 받들어 우리 문화재를 지키며 일구어 나가겠다는 후학들의 말없는 다짐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동해구 앞 모래둑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은 문무왕의 유언대로인지 평화롭기 그지없다.

◇폭파될 뻔했던 대왕암

1967년 신라 오악 조사단은 당시 대왕암을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 하여 신문에 대서특필하였으나, 실은 그 이전부터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시신을 화장한 후 납골을 뿌린 산골처(散骨處)로 이미 알려져 왔다.

대왕암 주변 사람들은 이곳을 '댕바' 또는 댕바위'라고 불렀다. 대왕바위를 줄여 부른 말일 것이다. 이곳은 발굴돼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만 해도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요, 미역을 많이 따는 바위 정도였다. 서정원(40·대본리) 씨는 "중학교 다닐 때까지 이 '댕바'에는 많은 사람들이 헤엄쳐 가 놀기도 했던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문화재감시단원으로 33년 동안 활동했던 김도진(67·대본리) 씨도 "댕바위는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집 미역 바위로 많이 달 때는 미역 300단 정도 달 정도였다."면서 "16세 때 선친께서 당시 이 주변에서는 바위를 폭파시키면 미역을 많이 단다고 해서 대왕암도 폭파하려고 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폭파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67년 경주군청 문화재감시단으로 채용된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대왕암을 조사하거나 답사할 때 배를 타고 들어가 안내를 맡았다. 하마터면 김 씨의 아버지에 의해 폭파돼 없어질 뻔 했던 대왕암이 다행스럽게 폭파를 면하고 그의 아들이 이를 보호하고 보존하는데 앞장서게 됐다는 것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기도객들이 몰린다

대왕암에는 요즘도 매일 수백 명의 수학여행단과 체험학습을 하려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주차장에 차를 다 못 댈 정도다. 이들 외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기도객들이 모인다. 대낮은 물론 심야, 새벽을 가리지 않고 돗자리를 깔아 놓고 그 위에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제단을 차리고 문무대왕릉을 향해 연방 절을 하거나 굿판을 벌이고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대전에서 관광버스 한 대를 대절해 30여 명의 무속인과 함께 왔다는 50대 무속인은 "대왕님께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해서 몇 번을 와서 기도를 드렸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가족은 "병도 잘 낫지 않고 집안일도 잘 풀리지 않아 이곳에서 굿을 하면 좋다고 해 굿을 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30년 동안 집에서 수확한 미역과 다시마, 오징어 등을 리어카에 싣고서 판매하고 있다는 김화(78) 할머니는 "특히 1월 1일, 정월 대보름과 입시철을 앞두고는 대왕님께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온다."며 "어떤이는 바닷가에 움막을 쳐 놓고 100일 기도를 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문무대왕릉 앞이 기도처가 된 것은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왜구로부터 지켰고, 그의 아들 신문왕이 바닷가에서 줍게 된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불면 왜구가 물러가고 가뭄이 물러가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영험"있다고 믿어서일 게다. 문무왕이 자신의 유언대로 후손들을 고난에서 구해준다는 믿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닐는지?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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