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여성 백일장] 대상-박경미 作 '손가락'

주민등록증 발급 때문에

동사무소에 갔다가

몇 번씩 헛걸음한

어머니

"허, 참! 지문이 나와야지…."

뭉개진 지문 내려다보며

한숨만 내쉬는

동사무소 직원

밖에 나가 담배 꺼내 물며

뻑뻑 흰 연기만 내뿜는

동직원 뒤로

어머니 흰머리가 하얗다.

"오늘도 안 되겠어요!"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동사무소 현관 나서는 어머니의

등 뒤로 퀭하니 묽은 눈빛이

안개 지는 동공 속

번지는 물기 머금고

몇 줄기 따라온다.

아카시아, 칡넝쿨, 산찔레 걷어내며

오뉴월 뙤약볕에 산밭을 매던,

갈라진 손톱마저 깎아본 지 오래된

닳고 닳은 어머니 손가락엔

뭉개진 세월이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데

언제일까요

손목에 감기는 푸른 새벽 당기며

칡넝쿨처럼 붉어진 힘줄

다시 불끈 퍼덕이며

저 앞산, 평원 같은 세상 만들 날은

어디일까요

고즈넉이 아버지가 쉬고 있는 산기슭,

저 山寺의 선문답에 화답하듯

산의 율을 고르는 저 산새소리

능선마다 씨줄 날줄 엮어가며

산망개, 산돌감, 산도토리조차

뭉개진 세월 되살릴 염주알로 잡혀

우리네 둥지 소생시킬 어머니의 피안은

나뭇가지처럼 말라버린 손가락

갈라진 손톱 속에

헤진 둥지 기우는 깁실 같은 세월의 실핏줄이

가녀린 맥박, 지친 숨결로 뛰고 있는데

들리는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며 흐느끼는 저 소리가

세월의 메아리마저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어머니 지문 속 동그란 맴돌이가

산새알처럼 부풀어 올라

보름달로 떠오르는 소리가

한 줌 지문마저

한 겹씩 벗겨내어 나눠준 어머니 손가락이

누워있는 산기슭 아버지 봉분을 가리킨다.

앙상한 어머니 손가락 지문이

소리 없는 보름 빛으로

아버지 봉분을 가리킨다.

풀려도 풀려도 끝이 없는 빛으로

봉긋한 둥지를

한 겹씩 한 겹씩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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