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와 사람)봉산젊은작가상 수상 서양화가 정병헌

지난달 말경 끝난 '제14회 봉산미술제'는 조금 특별한 행사였다. 개막식을 전야제 형식으로 한 것도 그렇고, 축사로 이어지던 기존 행사를 음악제로 꾸민 것도 그랬다. 그러나 이보다 더 행사를 의미 있게 만든 것은 올해 처음 제정한 '봉산젊은작가상' 시상이었다.

그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서양화가 정병현(34) 씨는 화랑 관계자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하고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1주일 전쯤 미술평론가 장미진 씨가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있으면 한 번 내보라고 하기에 전시회 팸플릿과 작품사진을 전해줬던 기억이

떠오른 것.

"부족한 저와 제 작품을 좋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정 씨의 수상 소감은 매우 상투적이었다. 정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수상 소식이 몇 배나 더 반가웠다."란 그의 설명이 오히려 당시의 기쁨을 더 잘 전해주었다.

심사 과정에 대해 설명듣고 나니 더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이번 심사는 봉산문화협회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 6인이 추천된 3인의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나눈 뒤 결정됐다). 이번의 영광을 있게 한 것은 바로 정 씨의 어머니이다.

작업의 모티브인 '보따리'는 바로 그의 어머니, 혹은 한국인의 어머니들이 걸어온 헌신과 노고의 길을 상징한다. 농사일 밖에 모르지만 아들이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봐온 어머니이다. 물론 정 씨가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룬 것은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다.

이는 집안 사정상 학비나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면서도 계속됐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정 씨는 친구들과 함께 인테리어 일도 했고 벽화 제작일도 했다. 공사장 막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의 트럭을 이용해 겨울에 어묵을 팔았던 일도 있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한 순간들이라 그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재미있게 보냈다."고 회고한다.

졸업하고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작업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계시는 청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재료비 챙길 정도'만 하고 있다. 작업을 하고싶은 욕심이 더 크기 때문. 아침에는 집안 농사를 도와야하기에(인터뷰를 위해 처음 전화를 했을 때도 일을 돕느라 통화를 하지 못했다.) 시간도 부족하다. 잠을 줄여서 작업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는 29일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 12월 중순 미국에서의 전시회 때문에 정 씨는 요즘 더욱 눈코 뜰 새가 없다. 형들이 찾아와 일손을 돕는 주말이 아니면 잠을 잘 시간도 거의 없다. 그래도 정 씨는 "작가가 전시회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라며 "내 작품을 많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지난해 한국적 주제가 담긴 자신의 작품을 알아본 한 전시기획자 덕택에 미국 LA에서의 개인전, 올해 6월 서울 갤러리안에서의 전시, 그리고 미국 샌디에이고의 장기 전시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구스타브 클림트보다 그의 제자 에곤 쉴레를 더 좋아한다는 정 씨의 역할 모델은 "죽기 전까지 작업을 계속했던 피카소나 백남준"이다.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작업만 하고 싶은" 그는 "외국의 메이저급 화랑에서 전시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로지 열심히 작업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서 "성실함이 묻어나온다."는 평가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다.

어려운 여건에도 4형제를 뒷바라지한 어머니의 고생에 보답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어머니 앞인 것처럼' 작품에 진실함을 담아내며 묵묵히 자기만의 작업세계를 이루어낸 정 씨. 그의 캔버스는 이미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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