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발차!"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12분 동대구역. 기관사의 힘찬 구령과 함께 동대구~포항 '통근열차'가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은빛 선로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정진후(38) 기관사가 가속레버를 당기자 서서히 가속력이 붙어면서 전면 유리창을 통해 가을 풍경이 몰려왔다. 기관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KTX와 새마을 등 빠른 열차와는 달리 시속 80km로 느릿느릿 달리는 통근열차는 추억의 통일호를 떠올리게 했다.
정진후(38) 기관사는 "통근열차의 운전방식은 새마을, 무궁화 열차와 달리 구식"이라면서 "부기관사 없이 혼자서 운행하기 때문에 신경쓸 것이 많다."고 말했다.
동대구역과 포항역 사이에 위치한 역은 모두 25개. 이 기차는 18개 역에서 정차한다. 고모, 가천, 금강, 청천, 하양, 금호, 봉정, 아화, 모량, 효자 등 역 이름이 정겹다.
통근열차는 자유석이다.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30분~1시간 정도 빨리 탑승해야 한다. 자리를 잡지 못한 승객들은 통로와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박용찬(34) 차장은 "이 시간 열차에는 400여 명의 승객이 탑승한다."면서 "포항에 도착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기 때문에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대부분은 어르신들이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하루 나들이를 위해 통근열차를 탄다는 것이다.
통근열차의 가장 큰 미덕은 요금이 싸다는 것. 65세 이상 노인들의 요금은 1천 300원. 1만 원 한 장이면 왕복 요금과 점심값으로 충분하다.
정홍기(74·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씨는 친구 4명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 씨는 "노인정과 복지관 등에서 하루를 보내다가 일주일에 두번정도 통근열차를 이용해 포항을 찾는다."면서 "운임이 싸기 때문에 친구들과 자주 포항을 찾아 싱싱한 회를 먹으면서 소주잔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정점희(60·여·대구시 북구 복현동) 씨는 동네 헬스모임 회원 4명과 통근열차에 올랐다. 열차 발차 시간 1시간 전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는 정 씨는 "자가용이 있지만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친구들과 뜻을 모았다."면서 "시간이 돈인 사람들은 KTX를 타야 하지만 나이든 사람은 시간이 많기 때문에 통근열차가 딱 맞다."고 했다.
도정옥(60·여·대구시 북구 복현동) 씨도 "포항에 도착해 싱싱한 횟감과 건어물을 구입해 저녁상에 올릴 계획"이라며 웃었다.
동대구에서 영천까지 매일 이 시간대 열차를 이용해 병원에 간다는 박숙자(67·여·대구시 동구 신암동) 씨는 "버스 보다 훨씬 저렴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매일 이용한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통근열차는 데이트를 즐기는 공간이자 직장인들에게는 출장길의 동반자다.
한태봉(26·경북 영천시) 씨와 김정은(26·여·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씨는 사이좋게 이어폰을 나눠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날 통근열차를 처음 탔다. 두사람은 "말로만 들었던 통근열차를 타니 어릴적 추억이 되살아난다."면서 "10월의 마지막 날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포항행 통근열차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말쑥한 양복차림의 직장인 허근영(27·서울) 씨는 "출장을 위해 통근열차를 가끔 타고 경주까지 간다. 한적하게 주위 풍경을 볼 수 있고 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10시 12분 동대구 출발 포항행 통근열차는 마지막 통근열차가 됐다. 11월 1일부터 이 시간대 열차는 무궁화호로 대체되고 추억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 '느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디지털시대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통근열차=2004년 4월 1일 고속철도(KTX) 개통과 함께 기존 선로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철도청에서 장거리 통일호와 객차형 통일호를 폐차, 남은 통일호 동차(CDC)를 존속시킨 열차이다. 통근열차의 2004년 4월 1일 이전 명칭은 '통근형 통일호' 였으며 통일호 폐지와 함께 통근열차로 이름을 바꿨다. 통근열차는 주로 근거리 운행과 대도시와 주변도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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