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권의 책)바다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처음 읽었을 무렵, 재미가 없어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내던져 버렸던 기억이 난다. 헤밍웨이의 장식 없는 문체는 초등학생이 도전하기에는 벅차지 않았을까 싶다. 책장만 차지하던 그 책을 다시 꺼내 든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영화 노인과 바다를 보고서였다. 새로 책을 찾았다. 다소 매끄럽지 못한 번역체의 문장도 노인과 상어의 진땀나는 사투를 상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항구로 돌아오는 노인의 고단한 뒷 모습은 신화 속 영웅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명'과 '인간'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느끼게 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 중에서 꾸밈말이 많은 책을 종종 만난다. 문장의 맛깔스러움이나 표현의 풍부함을 전할지는 모르겠으나 단지 그 수준에서 그치고 말 때면 영 아쉽다.

이러던 차에 만난 '바다소(차오원쉬엔 글/다림 펴냄)'는 아주 신선한 책이다. 서양 위주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화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책에 실린 4편의 이야기 중에 표제작인 '바다소'를 먼저 읽었다. 표지 그림을 보고 내용을 어림짐작했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아이가 검은 소 등에 올라타고 있는 그림은 언뜻 초동(草童)처럼 평화롭게 보인다.) 문장도 박진감이 넘쳤다. 한 달음에 책을 읽어내려갔다.

이야기는 이렇다. 눈 먼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년은 어느 날 늙은 할머니를 대신해 돈을 가지고 바다소를 사러 간다. 처음에 고분고분 소년을 따라오던 바다소는 점점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다. 콧김을 뿜으며 성을 내던 소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가기 일쑤다. 소와 꼬박 하룻밤을 씨름한 소년은 배고픔과 추위, 공포로 인해 길 위에서 완전히 체력이 바닥나 버린다. 소년은 이제 소가 하는 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날씨조차 소년을 돕지 않는다.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천둥소리에 놀라 소가 강으로 달려간다. 소년은 힘없이 진흙에 자빠진다. 그 때 손자를 돕기 위해 할머니가 위태롭게 강을 건너는 모습이 보이고, 바다소는 강둑에 승리자처럼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다. 그 순간 소년은 바다소의 모습에서 어떤 원시적인 생명력과 정복욕을 느끼고 소에게 달려든다.

거칠고 강인한 바다소를 사서 끌고 돌아오는 길은 소년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고통스런 여정인 셈이다.

이렇듯 바다소는 그 주인공이 노인에서 소년으로 바뀌었을 뿐 온몸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노인과 바다'와 일맥상통한다. 최병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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