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해변, 부부의 손을 잡은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어요. 갈매기를 흉내내려는 듯 아이가 두 팔을 펼치며 뛰어갑니다. 따스한 햇살 속에 갑자기 아이의 손을 놓친 아빠가 파도에 휩쓸립니다. 아이는 흐느끼다 정신을 잃고···.'
소스라쳐 잠을 깼습니다. 어김없이 같은 꿈입니다. 움찔한 탓인지 병실에서 잠을 자던 보민(8)이가 슬몃 눈을 뜨네요. 아이는 여느때처럼 코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엄마 코피, 코피 또 나." 저는 아무일도 아닌양 손수건으로 슥슥 닦아줍니다. 엄마가 울면 아이는 더 크게 울기 마련이니까요.
석달 전 아이는 뇌종양을 제거했습니다. 교감신경에 악성종양이 생겨 자라는 신경모세포종 4기라는군요. 저 조그만 머리 속 어디에서 틈을 비집고 자랐는지···. 잡초같은 이 몸쓸 것은 잘라내도 끝이 없다고 합니다. 큰 수술만 벌써 세 번이나 받은 보민이가 대견할 뿐이지요. 아이가 자주 코피를 쏟고 귀가 멍하다며 투정부리는 것은 항생제에 취해버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게 별로 없어요. "코피는 착한 사람한테만 난다, 귀에는 무서운 도깨비가 들어 있다."고 하면 되니까요.
꿈처럼···제게는 이 아이 뿐입니다. 남편은 다섯달 전에 세상을 떴지요. 건강했던 남편은 아이 간병에 많이 힘들었나봐요. 뇌출혈이었는데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됐다고 하더군요. 4년 전 보민이가 소아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강한 사람이었는데. 절망하면 끝이라며 손을 꼭 잡아주던 남편의 어깨가 절박하게 그립습니다.
이 병원에는 다시 오기 싫었습니다. 남편을 보낸 곳도 여기고 보민이도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요. 떠난 자는 몰라도 떠나보내는 슬픔을 아는 저는 너무 겁이 납니다. 그 아픔이, 그 고통이 반복될까봐 두렵습니다. 하늘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내 아이에게까지 죽음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란 법이 없으니까요. 한 줌 흙으로 날려보낸 그 느낌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저는 어떻게 용기를 내야하나요.
보민이도 아빠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어린 것이 슬픔을 감출 줄도 알아 우는 법이 없답니다. 또래 아이들처럼 징징거리고 훌쩍거린다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제 앞에선 사뭇 의젓한 척 하지요.
엄마, "내가 여덞살이고 아빠가 6월에 없어졌으니까 아빠랑 나랑은 8년하고 여섯달 같이 산거지"라고 아이가 물어봅니다. 저는 그러지요. "머릿 속에 나쁜 것만 없애면 아빠 보러 갈 수 있는데 빨리 나을거지"라고 말이예요. 종양이 아이를 삼켜가고 있습니다. 비행기만 타면 아빠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 이 작은 아이를 제게서 떼어가지만 말아주세요.
7일 오전 대구 영남대병원에서 만난 정윤희(가명·35·여) 씨는 병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보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그림책에 삐죽삐죽 낙서를 하던 아이가 엄마를 보자 씨익 웃었다. 와락 안기는 모습이 딱 여덞살배기다. 보민이가 앓고 있는 소아암은 발병원인도 제대로 진단하기 어렵고 치료도 힘들어 큰 돈이 들어간다. 정 씨는 1차 수술비 1천만 원을 갚지 못해 빚에 쪼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남편이 사망한 후 아이를 돌보느라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신청할 시간도 없었단다. 정 씨는 "남편이 떠난 뒤 아이를 돌 볼 겨를이 없었다."며 "보민이가 다시 아픈 것이 내 잘못 같아 아이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보민이는 수영선수가 꿈이라고 했다. 바닷가에서 아빠랑 뛰어놀던 기억 때문이다. "보민이는 울지도 않고 참 착한 아이네?" "아빠가요, 남자는 강해야 한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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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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