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신라 화엄 10대 사찰 청도 용천사

예전, 절로 들어오는 길은 험난했다. 절을 찾아오던 보살도 넘어지고, 짐을 싣고 다니던 소나 말도 자빠졌다. 대구-청도를 오가는 나그네들도 험하고도 험한 길을 따라 용천사(湧泉寺) 를 오가느라 힘들었다. 얼마나 험했으면 중국 대륙에서 가장 험준하다는 촉도(蜀道·스촨성가는 길)보다 더 위태롭다고 했을까. 대중의 이런 고통을 보다 못한 용천사 스님들이 지혜를 모으고, 돈을 마련하여 절 밑으로 오가는 길을 수리했다. '용천사 동하도로 수치 송공표석'(경북도 유형문화재, 1725년)은 그렇게 세워졌다. 약 1천400년 전,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태백산 부석사 등과 함께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로 의상대사가 창건(671년)했던 신라 고찰 용천사는 숭유억불정책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조에도 대웅전을 포함하여 27동의 당우를 거느렸던 대가람이었는데 언제부터 퇴락하기 시작했을까? 지금은 아주 쇠락한 모습이다. 화주가 줄을 잇던 과거의 영화도 사라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가득 찬 사바세계에 무공해 청정 감로수를 선사하고 있는 용천사는 '길 없는 길'을 따라 '21세기의 비상'을 화려하게 꿈꾸고 있다.

◈ 펑펑 솟아나는 감로수가 키(Key)

그렇게 다니기 험하다던 용천사는 헐티재가 뚫리면서 마치 길갓집처럼 나앉아 있다. 과거에는 출입은 편하지 않았지만 호리병처럼 생긴 지형의 맨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모두들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돌아나갔는데, 지금은 사역이 어디까지인지 알 길조차 없다. 임란 때 대부분 당우들이 소실되어 버렸지만, 조영대사가 3중창(1631년)한 대웅전은 400년의 연륜을 보여준다. 그뿐이랴. 만추가 내려앉는 비슬산 용천사 일대의 산색 어디를 둘러보아도 청정 법신불이 아닌 곳이 없으며, 넘쳐 흐르는 용천사 샘물은 부처님의 자비광명에 다름 아니다. 용천사 물은 유명하다. 대구권은 물론, 부산 김해 다인(茶人)들도 용천사 물을 고정적으로 받아간다. 차맛은 물맛이 좌우하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용천사 물을 한 트럭 가득 받아가던 처사는 말했다. "희한해요. 다른 데 물은 2, 3일만 되어도 청태가 끼는데, 용천사 물은 보름 동안 괜찮아요. 식당을 하는데, 감로수를 맘껏 주는 용천사 부처님께 늘 감사드리죠." 용천사는 원래 이름이 옥천사(玉泉寺)였을 정도로 대웅전 뒤편까지 뻗쳐 내린 화강암을 뚫고 석간수가 펑펑 솟구치고 있다. 경주지역에 신라 우물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생수로 하는 곳은 용천사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샘밑 동굴에 용이 산다, 혹은 물길이 감포 문무대왕릉까지 통한다고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물을 받아두지 않아도 하루 200~300명씩 양껏 받아갈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맛있는 물을 무한정 보시하는 착한 성지 용천사는 그 물을 기반으로 다시 한번 도약을 꿈꾸고 있다.

◈ 그 많던 당우들은 어떻게 사라졌나

"만물에 불성(佛性)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물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지 않습니까."

용천사 주지 정관 스님은 '물축제'를 꿈꾸고 있다. 불교의 생명중시사상과 웰빙 무공해 트렌드에 축제의 포커스를 맞춘다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물축제에는 불자 비불자, 세간 출세간을 분간하지 않을 작정이다. 무아, 친자연을 기본으로 모든 이들이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맞으면서 행운을 빌어주는 물축제는 국내 어디도 없다. 다인들은 헌다식을 하고, 일반인들은 물지게나 물동이를 이고 지며 추억을 되살릴 수도 있다. 아이들의 물총놀이도 재미있겠다. 용천사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무공해 친자연적인 물축제는 청도군의 이미지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원동 청도군수는 "비슬산 용천사는 석간수가 솟아나는 샘도 그렇지만, 사람으로 치면 발바닥 급소쪽인 용천에 위치한 매우 중요한 사적지인데, 여기서 물축제를 한다면 괜찮을 것"이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한때 용천사는 해인사, 범어사에 못지 않은 대가람이었다. 사적기에 따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바둑판에 돌 놓인 듯 정연하게 가람이 배치됐고, 층층이 늘어선 법당과 요사채는 하늘로 우뚝 솟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적혀 있다.

용천사 중창불사가 한창이던 17세기 중후반에는 의상대사와 보각국사 일연 스님의 영정을 모신 관음전이 10칸, 향도들이 기거하는 양진암이 12칸 규모였다. 대문 좌우에 5칸의 행랑채(익랑)까지 내달았던 양진암의 가운데는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까지 있었다. 당시 석대암은 기도 도량이었고, 은서암 연당 보운전은 용천사 서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극락암은 절의 10리 바깥에, 백련암은 남쪽 5리가량 떨어져 있었다고 하니 용천사는 사역을 밝히는데 조계종과 경북도, 청도군의 관심이 필요하다.

◈ 거대한 범종형 화강석 부도군

서쪽 기슭에 사리탑 6기가 있다는 말에 올라가보니 과연 백련당 취월 대허 우운 청심 회진 등을 모신 부도군(경북도 문화재자료 478호)이 있다. 범종 모양인데, 자연석 기단 위에 연꽃 무늬 선명한 연화좌를 올렸다. 대웅전 앞 마당에는 옥개석이 날아간 고려시대 3층탑이 있고, 목 시왕상과 16나한이 명부전과 나한전에 각각 모셔져 있다. 혹자들은 용천사의 전성시기에는 승려가 무려 천 명이나 되었고, 주변 암자는 47개였다고 하나, 사적기에 나오는 암자만 따진다면 27암자(147칸, 익랑 91칸, 도표 참조)이다.

용천사에서는 이미 24명의 도인(아마도 창건주 의상대사나 이곳에 주석하셨던 일연 스님 그리고 중창불사했던 조영 대사 등을 일컫는 것일 듯)이 나왔고, 앞으로도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꾸준히 정진하다보면, 용천사를 빛낼 큰 인물(도인)이 나오겠지요." 도로 개통으로 되바라져 얕아보이지만,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말사인 용천사는 깊은 뜻을 품은 채 기다리고 있다. 신라시대 화엄 10대 사찰로서의 위엄과 17세기 내내 이어진 중창불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화주들이 피웠던 연꽃 한송이를 다시 꽃피울 그날을.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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