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명색이 문단 말석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종종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선생님, 저는 글재주가 없나 봅니다. 도무지 늘지가 않아요. 글 좀 잘 쓸 수 있는 비결이 없습니까?" 이때 내 대답은 항상 천편일률적이다. "없습니다. 그걸 알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러면 대개 떫은 감 씹은 꼴이 되었다가 시나브로 실망의 표정을 짓게 된다. 단언컨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이 글재주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태양 아래 새로움은 없다고 장담한 보르헤스도,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내 이름은 빨강'의 저자 오르한 파묵도….
그 얘기를 들려주면 그제야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요즘 글공부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면 거개가 죽살이치게 써대기만 하는 창작파들이다. 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술자리가 마련되고 알맞춰 취기가 오르면 나는 슬쩍 그 질문자에게 다가가 술 한 잔을 권하며 귓불에 대고 가만히 중얼거린다. "비책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일순 눈이 화등잔만하게 열리며 귀가 쫑긋해진다. 그러나 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예의 비책이란 걸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어뜨리기 일쑤다. 비책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부터 3년 계획을 세워라. 일 년은 무조건 읽어라. 다음 일 년은 읽으면서 생각하라. 나머지 일 년은 읽고 생각하면서 써라. 그러면 지독한 복처리가 아닌 다음에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알고 보면 참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그걸 우직하게 실천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빨리 뜻을 이루려는 욕망의 두억시니가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로 은밀히 유혹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정도의 역순이다. 무조건 많이 써라. 그러다가 안 되면 쓰면서 생각하라. 그래도 안 되면 쓰고 생각하면서 읽어라.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미궁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이런 유혹의 감언이설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정도가 지름길이요, 사도가 에움길임을 진정으로 모르는 사람들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우연히 그 질문자를 만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그때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은 게 정말 후회됩니다." 그러면 나는 또 앵무새처럼 중얼거린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릅니다. 지금부터 3년 계획을 세우십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입에서는 판박이처럼 한숨이 터져 나오고 고개는 더욱 깊이 숙여진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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