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 낙엽을 읽으며

화실 계단 위로 수북이 낙엽이 떨어져 쌓인다. 바야흐로 낙엽의 계절인가 보다. 한 쓰임이 끝나고 또 다른 쓰임에게로 건너가는 저 아름다운 퇴장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누구라도 쉽게 기쁨을 자랑삼지 못하며 슬픔을 억울해하지 못한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하나도 애써 나뭇가지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고 나뭇가지 또한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른바 '無爲'라 하였던가. 이럴 땐 그 어떤 미사여구나 감미로운 달변도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눌변이 더 어울리고 눌변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제격이다.

떨어져 나뒹구는 나뭇잎 속에는 우리가 놓쳐버린 지난 시간들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연초록 꿈을 품고 하늘을 향하던 봄날에서부터 비바람과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던 모든 시간들이 마치 수백만 분의 일로 줄여놓은 축도(縮圖)처럼 간직되어 있다. 지난(至難)했던 그 시간들, 그러나 그 멀고 긴 시간마저도 저 한순간의 작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생 동안 겪어온 모든 변화를 10이라고 한다면 생명을 버리는 순간이야말로 90이 넘는 변화인 셈이다.

우리가 책에서 지식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자연에서는 지혜를 읽을 수 있다. 자연에서는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오감을 통한 포괄적 이해와 느낌과 느낌 사이에서 오는 감동을 얻게 된다. 실황의 돌비서라운드며 와이드 스크린이라고나 할까.

제각기 다른 모양새의 낙엽 하나하나에서 많은 지혜와 슬기를 읽을 수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의 독후감에는 언제나 다음 몇 가지가 희미하게 기록된다.

첫째, 낙엽에는 한 생명이 겪어온 삶의 흔적이 가감 없이 남아 있다. 단풍잎은 단풍잎대로, 떡갈잎은 떡갈잎대로 자신이 겪어온 시간들을 간직하고 있다. 태양을 즐겼으면 태양을 닮아 있고 별빛을 흠모했으면 별빛을 닮아 있다. 태풍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낙비에도 고개 돌리지 않으며 자중자애한 세월이 기록되어 있다.

그 누가 고통과 고뇌를 이기지 않고 깨달음에 이른 자는 없다고 하였던가. 홀로 떨어져 발길에 차이고 나뒹굴다가 그나마 남은 빛깔마저도 스스로 거두어 가는 모습이야말로 성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둘째, 낙엽을 읽다보면 쓰임과 역할에 대한 소리 없는 가르침이 전해져 온다.

무릇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 나름의 쓰임이 있기 마련이다.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의 쓰임이 있고 기둥은 기둥대로 서까래는 서까래대로의 쓰임이 있다. 세상 전부가 빛으로만 가득 차면, 그리하여 그늘이 없고 휴식이 사라지면 그 어떤 생명도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큰산은 큰산대로, 작은 언덕은 언덕대로의 소임과 역할이 있다. 마땅히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또 다른 쓰임을 위하여 자신의 역할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일그러진 몸을 채근하며 자신의 소멸을 향하는 낙엽을 보면 능히 헤아리리라. 미래에 대한 믿음만큼 풍요로운 자산이 없다는 것을.

셋째, 낙엽 속에는 사유(思惟)의 미립자들이 마치 백과사전처럼 가득하다.

거기에는 욕망에 의한 기다림이 있고 거기에는 섭리에 따른 헤어짐이 있다.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을 넘어선 무애와 초월이 있다. 또한 길이 있고 길의 끊어짐도 있으며 있음이 있고 없음도 있다. 버림과 선택 또한 나란히 함께 있다.

자신을 버리는 낙엽의 길은 그러나 존재에 대한 저버림으로 또 다른 쓰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대한 선택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말하자면 이때의 없음(無)은 있음(有)이 원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결과가 아니라 있음(有) 그 자체의 근거이자 독립적인 실존의 개념이다.

봄이 오는 것을 막지 않는 계절이라고 한다면 가을은 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 계절이다. 낙엽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내일, 그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생각해 본다.

민병도(시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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