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도서부에 들어갔다. 비교적 자유롭게 학교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중학교 3년간을 기차 통학을 하였다. 경주에서 사십리 떨어진 곳이 고향이니 당시에는 기차를 타고 1시간 가까이 다녔다. 시간이 아까웠다. 그 지루한 시간은 독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역에서 책을 읽다가 기차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처음에 많이 나무랐다. 어디 한두번이던가. 나중엔 그렇겠거니 하였다. 그랬다. 나는 적어도 책 속에 파묻혀서 살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오면서 문예반에 들어가 시라는 것을 처음 써보았다. 몇 차례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고 우쭐하여 나의 장래 희망은 '시인이다'고 덜컥 정해버렸다.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 아니던가. 그 철딱서니없던 열정은 20년만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나는 결국 시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때 읽은 책들의 힘 때문이리라.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이덕무(李德懋)라는 사람이 있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를 달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서도 일가를 이룬 분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남달리 책 읽기를 좋아했다. 스스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이다.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되도록 일찍이 하루도 손에서 옛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으며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얻은 줄 알았다."
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독서에 탐닉했는가를 알 수 있다.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는 독서의 경지라면 '책만 읽는 바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나도 언젠가 저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너무 세속화되어 도무지 가당찮은 일일 것 같다.
나날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가하게 앉아서 책이나 읽는 시대는 지나 갔는지도 모른다. 방안에 앉아서도 만리 밖 세상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배달되는 인터넷 시대이니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책만 읽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책은 만들어질 것이며,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내일을 꿈꿀 것이다. 책 속에 파묻혀 살고자 했던 간서치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는 것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박진형(시인·도서출판 만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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