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①다시 불러보는 귀거래사

시골의 여름 아침은 빠르다. 이른 시간부터 친지, 친구 몇 사람이 반기며 찾아왔다. "아이고, 잘 왔다.", "그간 수고했다", "인자 막걸리나 묵자", "낚시나 가자" 등 한담객설(閑談客說)이 오간다. 1998년 7월 공직생활(새마을중앙회장)을 마감하고 귀향한 나를 반기는 고향의 모습이다.

"요새는 좀 어떻노?"하고 수인사를 하면, "안 노나"한다. 다시 "아들은 뭐하노?"하고 물으면 "직장 잃고 집에 엎드려 있다. 취직 자리 하나 뚫어 다고"하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 말투와 표정에서 그들의 마음에 내재하는 자조(自嘲)와 자괴(自愧)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는 술 한 잔 하자는 것이다. 석양에 주막을 찾으면 거의 중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막걸리판을 벌이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 벌써 정년 퇴직을 한 실업자들도 많다. 와지끈거리는 술판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누구 부도나고, 우리 고장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들이 파산했다는 환란 여파의 이야기들이다. 거기에 정치를 빗댄 비아냥거림도 섞인다. 특히 지난 정부의 비정(秕政)에 대한 비난과 회의의 토로는 대단하다. 나는 그저 묵묵부답이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시장 안, 장판 막걸리집 풍경도 옛날과 같지는 않다. 쓸쓸한 분위기 일색이다. 얼마 전만 해도 이곳은, 가난하면서도 가난함을 느끼지 못함인지 별로 가진 것 없으면서도 넉넉한 듯 세상을 탓하지 않고 시대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저 주어진 여건에서 묵묵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였다. 막걸리와 생된장독에서 금세 건져낸 고추에 돼지 삼겹살을 곁들이는 맛과 정취는 메마른 가슴을 윤택하게 해준다. 장소가 워낙 협소해 한 잔 마신 후엔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하지만, 들락날락하는 주객들 중에는 자리를 물려주며 나의 술값까지 몰래 셈하고 가는 순후하고 소박한 고향의 정이 오고가기도 한다.

이제 나도 모든 시름을 다 털어버리고 하루 빨리 가업(家業)인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한다. 일이란 처음 시작하기보다는 한번 시작한 일을 그만 두기가 훨씬 어렵다.

'고향'이란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한한 자력(磁力)을 갖고 있다. 어릴 적 모래사장에서 지남철로 글겅이질을 하면 버려진 못이나 미세한 사철이 달라붙곤 했다. 그 신기했던 경험을 나는 고향으로의 회귀본능과 연계시켜 본다. 우리말의 사전적 해설로는 자기력이 미치는 공간을 자기력의 장 또는 자계(磁界)라 한다. 페러데이 이론에서 온 개념이다. 이 자장(磁場)의 강도 즉 자석이 서로 끌고 미는 유도의 힘을 생각하면서 물리(物理)에 어두운 소치인지, 그 보이지 않는 신비성에서 나는 고향은 자장의 힘을 갖는다고 믿는다.

이제 우리나라 도시 인구는 전 국민의 84%를 초과하고 있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어떠한 형태로든 도시와 관계를 갖고 생활의 기반을 도시에 두고 있다. 즉 촌뜨기라 불리던 촌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 일의 얽매임을 훨훨 털어 버리고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찾는 귀농인구 중 한 사람이 되려 한다. 고향 친지나 그간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 함이다.

경주군청에서 경상북도 도청으로 전근발령을 받아 고향을 떠난 지 55여년, 내무부로 전근되어 처음 서울로 올라 온지 40여 년이 되는 셈이다. 모든 일을 끝낸 지금, 고향은 강한 자장력으로 나를 끌어 당기고 있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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