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 용팔이가 누군데?

기억의 창고 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시골 국민학교 교실 풍경입니다. 지금은 얼굴조차 아련한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는, 자투리 시간이 나거나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으레 입담이 좋은 아이들을 차례로 교탁 앞에 불러내어 이야기를 시켜 놓고 돌아앉아 장부를 뒤적였습니다. 이야기의 재미 속으로 아이들을 몰아넣어 대책 없이 시끌벅적한 교실 안의 소란함을 평정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아이들은 또 골치 아픈 공부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그 속에 당의정처럼 녹아 있는 기쁨을 병아리들처럼 삐약삐약 곱씹으며 그 시간을 즐겼었지요. 아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랬자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냄새가 폴폴 나는 것들뿐이었지만.

그날 이야기 시간의 1번 타자로 내 친구가 나섰습니다. 등하교 십리 길뿐 아니라 들로 산으로 꼴을 베거나 꿀밤 따러 갈 때 등 잠잘 때 빼고는 늘 붙어 다니는 친구였기에 녀석의 머릿속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나로서 '저 녀석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용감하게 손을 들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형편없는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옛날 옛날에 어느 산골에 포수가 살았는데…어느 날 사냥을 나간 포수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는데…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활을 메고 호랑이가 산다는 깊은 산골로 들어갔는데…한 고개를 넘자 열댓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걸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 옷을 입은 호랑이들이라. 그런데 맨 앞에 걸어오던 용팔이만한 놈이 갑자기…."

녀석의 이야기가 그런대로 무르익어 숨 가쁘게 오르막을 오르는 순간, 정말 갑자기 '용팔이가 누군데?'라는 말이 청중석에서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이야기에 취해 산속을 헤매던 친구 녀석이 '니는 용팔이도 모르나? 우리 동네 오동나무집에 사는 용팔이 말이다. 키도 장대처럼 크고 얼굴도 시커멓고 힘이 장사인 용팔이 말이다.'라고 주절거리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딴죽을 걸고 나섰던 목소리가 다시 '너거 동네에 사는 용팔이가 오동나무집에 사는지 대추나무집에 사는지, 얼굴이 시커먼지 새파란지, 힘이 센지 약골인지 우리가 우째 아노?' 하며 대들자 숨죽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도 입을 모아 '맞다 맞아, 용팔이가 누군지 우린 모른다.'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나 토론 마당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증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들이대며 어깃장을 놓는 상대를 만날 때, 문득 떠오르는 삽화입니다. '용팔이가 누군데?'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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