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이성수 作 '차(茶) 한 잔 하세'

차(茶) 한 잔 하세

이성수

차 한 잔 들라치면

하늘도 다가와 앉는다

슬픈 날이거든 아무 말 다 묻어 두고

차 한 잔 하세.

괴로운 날이거든 생각마다 접어두고

차 한 잔 하세.

차 한 잔 하고 보면

푸른 하늘이 배어 온다.

무거운 것 벗어버리고

가벼운 생각들도 풀어버리고

하나는 하나요

하늘은 하늘임을

구천동 백련암

연꽃이 번다.

우리

차 한 잔 하세.

깊은 가을 날,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산사가 아니더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는 호젓한 곳에서 한 잔의 차를 앞에 두면 '하늘도 다가와 앉'을 것 같다. 이럴 때, 세속적인 삶에 찌들었던 마음의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 슬픔, 세속적 그리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여 '차 한 잔 하고 보면' 어느 새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나'에서 '열'을 구하려 했던 욕망의 눈을 감으면 비로소 '하나는 하나'임을 알게 된다. 한 잔의 찻물에 번뇌를 씻으면 범인(凡人)이라도 마음속에 '연꽃이 번'지는 경지를 체험할 수 있으리.

이 가을, 모든 것을 잊고 '차 한 잔 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그 또한 축복된 시간일 것이다.

구석본(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