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감

발 끝에 차이는 가랑잎이 제법 도타워진다. 더도 덜도 않은 晩秋(만추)다. 이 계절엔 우리 마음도 푹 익어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떨림으로 와닿는다. 가을바람결에 떨어지는 은행잎은 그대로 샛노란 비다. '丹楓雨(단풍우)'라는 이름은 왜 없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늦가을 감나무를 보는 건 특별한 즐거움이다. 눈이 시린 에메랄드빛 하늘, 부드러운 능선의 산비알 아래 올망졸망한 집들, 잎을 다 떨군 가지에 주렁주렁 안겨 있는 주홍빛 감들. 거기에 돌담이나 토담이 어우러져 있다면 완벽한 가을의 정물화이다.

감을 먹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정도. 하지만 시골길 어디서나 감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우리에 비해 중국이나 일본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중국 감은 주먹에 한 대 맞아 뭉개진 듯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인데다 맛도 그저 그렇다. 일본인들도 우리만큼 감을 즐기지는 않는 것 같다.

감에 대한 우리네 정서는 유난하다. 초여름 감꽃 필 무렵이면 고샅길에 떨어진 감꽃을 실로 엮어 목에 걸었고, 긴 오후나절 감꽃은 아이들의 심심한 입을 달래주었다. 지붕 위에 장독 위에 톡, 톡,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풋감이며 떫디 떫은 땡감은 뜨물단지에 삭히면 맛이 근사했다.

가을에 감나무는 신데렐라처럼 변신한다. 잎사귀는 어떤 단풍 못지않게 고운 물이 든다. 검은 가지와 주홍 감들의 기막히는 콘트라스트! 무성하던 잎들은 열매의 세상이 왔음을 인정하고 미련없이 가지에서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준다.

석양 무렵의 감나무는 환상 그 자체다. 홍시 빛깔의 노을과 노을 빛깔의 홍시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물들인다. 그야말로 "노을을 퍼마시고/ 노을을 퍼마시고/ 노을이 된 홍시"(박유석 동시 '홍시')다.

곶감도 그렇지만 오지 항아리 속에 쟁여놓고 겨울날 따끈한 아랫목에서 인절미나 백설기·가래떡을 홍시에 찍어먹는 그 맛은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감식초·홍시 와인·홍시 통조림, 홍시 아이스크림, 아이스 홍시…. 옛말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 더니 요즘 같아선 이도 고쳐 써야 할 것 같다. 한낱 감도 저리 쓰일 데가 많은데 어째 쓰잘데 없는 인간은 자꾸 더 많아지는지….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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