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중앙회장을 사임하고(1998), 마지막으로 새마을의 사무실을 떠나는 날, 젊은 직원들이 "한 잔 하고 가시지요"했다. 주안상(酒案床)의 차림새는 어떠하든 간에 사실 그들에게 베푼 것이 변변치 못한데 도리어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미안하고 떳떳하지 못했다. 더욱이 자숙과 내핍을 요구하는 IMF 환란 중이어서 더 마음에 걸렸다. 왠지 현관 게양대에 펄럭이는 새마을 기(旗)에 자꾸만 고개가 되돌려졌다.
국세청장을 끝(1982)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다짐으로 모처럼 고향에 돌아갔으나 수절(守節)의 뜻이 한 해를 채우지 못한 채 한국토지개발공사 사장에 임명되어(1983) 고향을 배신한 꼴이 되어버렸다.
내 생애를 통해 삼복더위에 산골 농장으로 법주 한 병과 참외 십여 개를 들고 왔던 왜관(倭館) 보신탕집 욕쟁이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 영감쟁이 뭐하노? 여기 처박혀 무슨 지랄이고? 이자 세상 좀 즐길 줄도 알아야지 쯧쯧쯧......하기사 코빼고 들앉아 있는 것보단 낫다."
대뜸 퍼붓는 욕설에 인부들이 '욕쟁이 할매' 왔다고 혼비백산 한 일도 있었다. 밤 10시가 넘는 시간에 안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영감 요새 힘 좋나?"하며 외설적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할머니의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지사도 개가?, ⅩⅩⅩ도 잘 있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할머니의 말은 욕이고 무례였다. "지사도 개(犬)가?"는 닭개장과 보신탕 중 어느 것을 먹겠느냐는 말이다. 할머니가 안부를 물어본 'ⅩⅩⅩ'는 당시의 현직 총리였다. 할머니는 총리라는 관직을 결코 사용하지 않고 늘 이름으로만 불렀다. 총리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나 총리에 대한 존경과 인간적 그리움은 오히려 관직 생략에서 더 진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할머니의 철학이자 풍류였다. 할머니에게는 모두가 평등했다. 총리든 지사든 할머니 눈에는 똑같은 단골손님일 뿐이었다. 할머니의 안부를 전해들은 총리도 파안대소했다. 그이의 욕설에는 또한 진한 인정이 묻어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팔순을 앞두었건만 활달한 성격 탓인지 정정한 그이는 그 날 나와 법주 한 병을 함께 마시고 산을 내려갔다. 그간 세월이 흘러 바람결에 소식을 들을 뿐이나 끈끈한 흙냄새 묻어나는 할머니의 해학과 정은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정을 두고 다시 온 서울 길은 16여 년이나 나를 도시에 붙들어 맸다. 세월이 흘러 다시 낙향을 하게 된 나를 안식구는 "이제 짐 벗었습니다"하며 반겨주었다.
"인자 머 합니까?"
"고향 가서 어머님 모시고 농사지어야지."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청춘인 줄 아는기요?"
미안한 마음에 차마 당장 같이 내려가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고향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외딴 시골은 아니나 생활문화 수준이 낮은 지방에서 서울문화를 조명해 볼 때, 어떠한 음영(陰影)이 나타날 것인가. 보지 않아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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