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토리도 낙엽도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안도현 시인 그림책 '관계' 출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 전문).

한 번만 들어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짧지만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고 재가 돼버린 연탄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짧고 굵은' 이 시는 특히 젊은 남성에게 인기가 많다. 인터넷 블로그나 개인 홈페이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를 쓴 안도현 시인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품을 발표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안도현 시인의 그림책 '관계'(계수나무)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도토리와 낙엽의 관계를 그렸다. 몇 십 쪽 되지 않는 얇은 책 속에 꿈의 실현과 존재의 가치, 더불어 사는 의미와 자연의 순환 등 많은 생각을 담았다.

가을이 무르익은 어느 날 갈참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도토리는 어둡고 캄캄한 땅이 무서워 울고 싶어졌다.

이 때 바로 옆에서 도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도토리야 걱정하지마. 지금부터 우리가 너를 지켜 줄게."

여름까지 함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도토리보다 먼저 땅에 내려와 있었다.

낙엽들은 도토리를 둘러쌌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포근히 껴안고 사나운 비바람을 막아줬다. 도토리는 가슴이 찡해서 눈물이 돌 것만 같았다.

도토리는 낙엽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딱딱한 껍데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낙엽은 오히려 도토리를 위로한다. "넌 이미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있어. 네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우리가 다시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거지. 그게 우리의 꿈이야"라고. 도토리는 낙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울이 되고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토리를 감싼 낙엽 위에도 눈이 쌓였다. 도토리는 낙엽의 품에 안겨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봄 도토리가 눈을 떴을 때 낙엽은 썩어 있었다. 가루가 돼 버린 낙엽들 속에서 도토리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토리는 이를 악물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단단한 껍데기가 찢어지며 파란 싹이 돋아났다.

도토리는 이제 낙엽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낙엽들이 말한 거로구나." 도토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보잘 것 없는 도토리와 말라 비틀어진 낙엽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다. 둘은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새로운 생명을 꽃피운다. 함부로 발로 차지 말아야 할 것은 연탄재만이 아니다.

44쪽. 9천800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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