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임종국 지음/민족문제연구소 펴냄
여류비행사 박경원은 1901년 대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3남1녀의 고명딸이라 대구 신명여학교를 다닐 무렵만 해도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그러나 18세가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날로 궁핍해졌다. 운전술을 배웠지만 그때 조선에서 남자도 아닌 여자 운전사가 설 땅은 없었다.
1925년 9월 일본 다찌까와의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여자가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상상조차 못하던 때였다. 그러나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2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당당히 여류비행사로 태어났다.
여성의 벽을 넘어 스스로 역사가 된 박경원의 '창공의 꿈'은 1933년 조선으로 비행 중 추락함으로 애기(愛機) '청연호'와 함께 산화했다. 박경원의 이야기는 지난해 영화 '청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여성도 많다. 한말에 2인의 여걸 진령군과 고대수가 그렇다. 무당 진령군은 신령스런 예언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다 비운에 간 인물이며, 키가 엄청나게 컸던 '흉물 혁명가' 고대수는 김옥균의 3일 천하에 합세했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낸 책이다. 그동안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에 가려져 여성들의 모습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왔다.
이 책은 '신여성 열전' '기생열전' '풍류로 엮는 여속(女俗)의 변천' '역사의 뒤안길에서 보는 여성사' 등 모두 4장으로 구성됐다. 우리 설화, 조선시대 기녀의 이야기, 일제 강점기의 신여성들과 역사의 뒤에서 역사를 흔들었던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비춰주고 있다.
'신여성 열전'에는 '사의 찬미'를 부르며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던 윤심덕, 한말 정계를 뒤흔든 요화 배정자를 비롯해 천주교 순교의 '꽃봉오리' 강코롬바, 김아네스, 김아가다 등 신여성들의 열정과 사랑, 성공과 실패를 통해 개화기를 엿볼 수 있다.
'기생열전'에서는 황진이, 제주기생 김만덕, 논개, 계월향 등 조선 명기의 모습과 우리 근대사 속의 일본 기녀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이외 남편을 출세시킨 슬기로운 여인과 아들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지혜, 신여성의 연애사, 정절과 슬기의 설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여인들의 삶을 유려한 필체로 선보이고 있다.
이 책은 경남 창녕 출신의 시인이자 친일파의 행적을 파헤치는데 평생을 보낸 문학평론가 임종국(1929~1989)선생을 기리기 위한 선집 중 하나. 지난 1995년 1~4권이 나온 지 10년이 흐른 뒤 그 후속편인 5~8권이 출간됐다. 5~6권은 여성지에 '여심이 회오리치면'이란 제목으로 장기 연재된 글을 모은 것이며, 8권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는 일제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전시동원체제 무렵 조선 민중들의 수난을 그리고 있다.
'신여성 열전'은 7권이다. 가부장제의 굴레와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에서도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신여성들의 도전과 좌절의 이야기인 동시에 한 많은 여인들의 잔혹사이기도 하다.
그동안 냉대를 받아왔던 여성들에 대한 다양한 접근도 흥미롭지만, 작가의 맛깔스러운 해석이 더해져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384쪽. 1만4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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