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병 신분으로 숨어지내던 지난 19년은 내 자신을 몽땅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도망자'(fugitive)를 차마 끝까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제목이 제 신세와 너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젊은 시절 한 때의 실수로 부대를 이탈해 도피생활을 하다 지난 5월26일 19년 만에 자수, 군 복무를 마친 이경환(39)씨.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피해오던 이씨가 19일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마치 가시밭길과도 같았던 지난 19년 세월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경기도 의정부 제2군수지원사령부 예하의 급양(給養)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씨는 입대 1년 만인 1987년 9월(당시 상병) 휴가를 나와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탈영(脫營)이라는 형극의 길로 들어섰다.
"이민을 가게 됐다"는 여자친구의 편지를 받고 휴가 기간 사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여자 친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씨는 절망감에 술을 마시다 부대 복귀시기를 놓쳐 졸지에 탈영병 신세가 됐고 이후에는 부대로 돌아가고 싶어도 두려움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씨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살던 서울 중계동 집에는 얼씬도 하지 못한 채 서울과 경기도 일대 만화방과 목욕탕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주머니에 있던 8만원 가량의 돈이 바닥나면서 생계를 위해 술집 웨이터에서부터 식당, 가방공장 등을 떠돌아 다녔다.
탈영 초기에는 검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시로 직장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 1999년께부터 서울 중랑구 상봉터미널 근처에 있는 가방공장에 들어가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지난 19년 동안 10여 군데의 직장을 옮겨 다녔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는 도피 기간 직장에서 낮에는 실컷 일하고 밤에는 숙소에서 잠만 자는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늘 쫓기는 처지로 인해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두려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혹시라도 길을 가다 경찰서가 나오거나 경찰관, 군인이 눈에 띄면 오던 길을 되돌아 가거나 멀찌감치 돌아서 갔다.
주민등록도 없이 가명으로 신분을 속였고 가끔 이동을 하는 경우에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적은 택시를 주로 이용했다. 직장 동료 등이 군대 얘기를 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2000년께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한양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닌 직장 동료의 이름을 둘러댔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었다. 100여만 원씩의 월급을 받았지만 늘 쫓겨 다니는 불안감이 겹치면서 술을 자주 마시게 됐고 이 때문에 돈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했다. 가족을 만날 생각은 엄두도 못 내다 탈영 7년째가 되던 해 가족들이 살던 중계동을 한번 찾아갔지만 일대가 온통 아파트촌으로 변해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씨는 "내 자신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다"며 "성격도 점점 더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 자체를 꺼리게 됐다"고 말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이씨는 한 때 세상과 결별하겠다는 '나쁜' 마음을 먹고 실행 직전까지 갔지만 "이것은 죽어서 될 일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접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 5월26일 자수를 얼마 앞두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단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수를 결정하고 자신이 다니던 가방공장 사장에게 '과거'를 솔직히 털어놨다. 자수를 위해 가방공장 사장과 수도방위사령부에 들어서면서 이씨는 "지금은 들어가서 형을 살지도 모르지만 나올 때는 개운하게 나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9년 만에 자수한 이씨는 수방사에서 재판을 받고 두 달 여를 복역한 후 8월11일 불혹(不惑)을 앞둔 만 39세의 나이로 원래 소속부대인 제2군수지원사령부에 상병으로 복귀했다.
이씨는 이후 도피생활로 인한 고통과 위병을 앓고 있는 점, 일반 병사들과의 나이 차이 등을 고려한 부대 측이 상급부대에 '현역복무 부적합' 판정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9월8일 상병으로 조기 전역했다.
이씨의 사연이 지난 9월24일 연합뉴스에 처음 보도된 이튿날 이씨는 기사를 본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고 그동안 중계동에서 묵동으로 이사를 한 노부모 등 가족들과 재회했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부친은 "이제부터는 가슴을 펴고 살아라"고 하셨고 이씨는 죄송한 마음에 말문을 열 수 없었다고 했다. 이씨는 짐을 챙겨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과 합류했고 10월 초에는 19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넉넉한 한가위를 보냈다.
6개월째 '자유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씨는 "요즘에는 '이게 자유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마음도 많이 안정됐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쳐다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탈영으로 인한 굴절된 삶은 남의 탓이 아닌 제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며 "이제 제 자신을 찾아고 이제부터는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 남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11월 현재 800여 명에 이르는 탈영병들에게 "한 순간을 참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며 "후회를 할 때는 이미 때는 늦은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씨는 애초 1988년 7월 탈영해 18년간 도피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1986년 9월 입대해 이듬해인 1987년 9월 탈영, 19년 만에 자수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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