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세파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간 느끼지 못했던 게으름이 찾아오고 몸도 나른해지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삼복더위라는 계절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정신적 해이에서 오는 懈怠(해태) 증세가 아닌가 싶다. 사전에 보면 해태란 일곱 가지 죄인 七罪宗(칠죄종) '교만하고 오만함, 인색함, 여색에 혹함, 분하여 몹시 성을 냄, 음식이나 재물을 탐냄, 질투, 게으름(懈怠·해태)', 즉 사람이기에 날 때부터 타고 난 모든 원죄의 일곱까지 근원 중 하나이며 내 평생 끈질기게 추구해온 금기 영역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다.
처음 고향을 떠날 때부터 입버릇처럼 뇌던 귀거래는 말일 뿐 이루지 못하다가 막상 인생 팔십을 바라보는 이제야 돌아간다 생각하니 돌이켜 보면 만감이 뒤얽힌다.
IMF 환란으로 썰렁할 줄 알았던 서울역은 피서지를 찾는 인파로 여전히 붐볐다. 늘 다니던 고향길이었지만 그날따라 웬일인지 고독감이 치밀었다.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사람도 아니요, 한번 가면 다시 올 기약마저 어려운 헤어짐도 아니고, 또 수시로 왕래하고 있는 오늘날인데도 왜 그럴까?
홀연 언젠가 읽었던 괴테의 에서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 붐비는 사람 틈을 밀어 헤치고 나아갈 때만큼 통절히 고독을 느끼는 일은 없다.'는 글귀가 뇌리를 스쳤다.
남으로 달리는 새마을호 열차는 추풍령 고개를 지나고 있다. 매양 느끼는 감정이지만 서울 경주간의 중간 지점인 이곳이 경북 도계(道界)라 그런지 같은 속도임에도 그곳까지 올 때보다 더 빠른 느낌이 든다. 고향에 빨리 가고 싶은 조바심 탓일까. 특히 이곳을 지날 때마다 되뇌는 느낌이 있다.
1973년 내무부 지방국장에서 충남지사로 발령이 나자 '國卒道伯(국졸도백)'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언론의 시선을 받았다. 부임한 그 날 저녁 임시 숙소로 정한 여관방에 손님이 두 분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은 당시 새마을 교육을 총책임지고 있던 독농가연수원의 김준 원장이었다. 그는 성경 한 권을 전하며 가슴이 답답할 때 '잠언' 3장 14, 15절을 눈여겨보라고 했다.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또 한 분은 대구에서 서예가로 활동하는 고향 선배였는데 "추풍령 고개를 맨발로 넘어 오시오."라는 부탁을 했다. 당시는 별로 느끼지 못하였으나 공직생활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욕심 부리지 말고 깨끗하게 살라는 충고의 말이었다.
그 말을 되새기니 문득 퇴계 선생의 행적이 떠올랐다. 선생이 단양 군수를 마치고 임지를 떠나 죽령(竹嶺)에 다다랐을 때 단양군 吏屬(이속)이 뛰어와 관전(官田)에서 생산된 麻(삼) 그리고 책과 서궤를 가져왔으나 선생은 사유물인 책만 챙기시고 마와 서궤는 관물이라 하여 물리치셨다고 한다. 공직자의 청렴함…. 퇴계 선생의 그 고고한 恒心(항심)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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