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선수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세계적인 부흥사가 된 미국의 '빌리 썬디'나 20세기 동방의 영적 스승으로 불리는 인도의 성자 '선 다싱'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을 한국 목사가 있다. 바로 선산 해평 출신으로, 대구 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내면서 '벽돌 한장 사기 운동'을 통해 약전골목(대구시 중구 남성로)에 있는 대구제일교회 구교회를 지었고, 계명대 제2대 재단이사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출신 목사 백은 최재화(일명 崔默, 1892~1962)이다. 이런 판단은 필자의 독자적인 견해가 아니라 최근 출간된 '태산을 넘어 험곡을 가도'의 저자 고(故) 김경하 목사(독립운동가)도 그렇게 평가했다.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 시절, 최 목사가 자전거로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하여 온전히 조선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은 대구·경북의 모교회이자 개신교 성지인 대구제일교회 구교회는 세운 지 70년을 넘겼어도 고딕식 벽돌건물의 고전적 우아함을 잃지 않고 있다. 한국사, 한국교회의 영광과 험로를 함께했던 최 목사가 걸었던 인생행로를 따라가면 개신교 성지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도 자연히 느낄 수 있다.
◈ 내 생에 대해서 왈가왈부 말라
최재화 목사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1993년 선산 비봉산에 애국지사 공적비(사진 1)가 세워졌다. 왜 이렇게 늦게 추서됐을까? 이에 대해 3·1운동 33인 대표 가운데 한 분이던 이갑성은 생전에 이렇게 증언했다. "평생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고, 광복운동의 논공행상에는 (그 자신이)입을 다물었고, 함구하라는 유언까지 남겨 자녀들이 선친의 유언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 목사의 행적은 일본경찰극비본 '고등경찰요사'로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나 일반인에게는 대부분 묻혀버렸다. 그렇다고 여기기엔 너무 아쉽고 죄송하다. 감히 누가 그처럼 순결하게 독립운동을 펼치고도 공적을 마다한 이가 있으며, 어느 누가 그만큼 진실되게 주님을 영접하고 기도와 헌신에만 전념했었던가. 이제라도 '애국의 화신' 최재화, 영남 개신교의 탁월한 지도자 최 목사, 계명대의 숨은 공로자 백은 최재화의 희생적 투쟁과 그가 걸어간 성지를 적나라하게 밝혀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 일제의 주구인 관직을 사직하라
미션스쿨 경신학교를 졸업, 일본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편을 잡던 최재화는 3·1운동이 터지자 경신 선배인 이갑성의 지령에 따라 경상도로 내려왔다. 대구만세사건 이후 고향인 선산 해평에서 면민을 이끌고 만세를 불렀다. 처음에는 평화시위였다. 시위 전 주재소를 찾아가 "격돌을 원치 않는다. 단 한 사람의 희생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경은 비무장 시위군중에게 발포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됐다. 결국 해평주재소를 습격하면서 무력투쟁에 돌입했다. 해평주재소 습격 이후 피신에 성공한 최재화는 동지들을 규합, 더 강력한 독립투쟁을 펴는데 이게 바로 '관공리(官公吏) 사직협박과 폐점위협사건' 이다. 일명 '제1차 최재화 사건'이다. '관공리 사직협박'사건은 최재화가 이영식(고 이태영 대구대 총장의 아버지) 김수길 허성덕 등과 함께 일제의 주구인 검사 헌병 경찰관 행정요원들에게 "자손만대에 오명을 남기지 않으려면 즉각 반성하고 현재 일에서 손떼라. 그렇지 않으면 비극이 초래될 것"이라며 공직에서 물러날 것과 상인들에게 가게 문을 닫으라고 강제한 것이다.
◈ 신흥무관학교 생도를 모집하다
관직, 공직근무자의 사직을 주문하고, 일제를 비난하는 벽보를 붙이면서 더 강력한 무장투쟁을 계획했다. 칠곡 군수 아들인 이명건(=이여성, 월북 인민화가 이쾌대의 친형) 김수길과 함께 독립투쟁을 위한 문서나 격문을 출판하여 민심을 선동하는 한편, 만주지방의 독립단체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 투쟁은 김수길의 체포로 발각, 또다시 피해 다녀야 했다. 그러나 최재화는 굴하지 않고 또다시 대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청년들을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산하 신흥무관학교에 보내, 군사훈련을 시킨 뒤 독립운동과 교육에 투입하는 '신흥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이 들통나 지명수배된 최재화는 상주에서 체포됐으나 일경을 따돌리고 중국 망명에 성공했다. 궐석재판에서 8년을 언도받은 최재화는 의열단에서 대일 테러를 감행하다가 김원봉과 결별하고 백범 김구 휘하로 들어갔다. 김구는 최재화에게 북경에서 임정의 자금을 모금하라고 시켰다.
◈ 죽음의 철로에서 주님의 종이 되다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며, 민족을 위해 투쟁도 하고 자금도 모아봤지만 뚜렷한 결실이 없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외골수인 최재화는 좌절이 이어지면서, 죽음을 떠올린 뒤 철로를 베고 누웠다. 기차가 지나가면 이 세상을 하직하리라. 죽을 각오로 철길에서 깊은 잠에 빠졌는데 희한하게 살아남았다 싶은 순간 큰 소리가 울렸다. "재화야, 네가 어찌 이렇게 되었느냐? 너는 내것이다." 독립을 향해 테러를 자행하고 생명을 살상하던 두 무릎이 저절로 꿇어졌다. 사나이답게 조국을 위해서 살아온다고 자부했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통곡이 솟구쳤다. 울면서 주님을 받아들여 다시 신학을 공부하고, 중국인 교회, 만주 동포 교회를 거쳐, 대구제일교회 목사(제5대, 1931~1942)로 부임했다. 자치파동으로 찢기고 갈라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새 성전 건축에 들어갔다. 분규로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쌓아올리고, 복음의 종소리를 널리 울렸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순전히 조선 성도들의 헌금으로 고딕식 첨탑이 아름다운 붉은 벽돌 성전을 세워서 1933년 입당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로 길을 구한 최 목사는 계명대 재단이사장(제2대), 계성학교 이사장을 거쳐 남한의 예루살렘이라는 대구 교계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대한예수교총회장을 역임한 최 목사는 선교사들에게 감사하지만 한국교회에 상처도 주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만큼 한국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국교회에 상처도 주었다. 교단이 분열할 때 자신들의 입장을 위하여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우리들의 부끄러움이다."
한국교회의 분열을 지켜본 최 목사는 선교사들의 공로를 인정하지만, 끝까지 그들을 믿을 수 있을까하는 처절한 고백을 한 것이다. 1962년 9월 17일 타계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이며, 위대한 목자였던 최재화를 기려 계명대학교는 백은관(자연대 건물)을 봉정했다. 최 목사는 고향 경북 선산읍 해평면 산양리 뒷산에 묻혀 대한민국이 부활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도움 죽순문학회 윤장근 회장(소설가)
최성구 안과의사(전 파티마병원 안과 과장,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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