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요즘 어떻습니까] 김만제 前 경제부총리

"대구는 메트로폴리탄 가는 과도기"

그는 기자가 인터뷰 장소에 나가 앉자마자 자료를 잔뜩 내밀었다. '멈추지 않는 나라와 고향을 위한 열정'. 그가 내민 자료는 제목을 이렇게 달고 있었다.

"매일신문의 '요즘 뭐하십니까'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나만큼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 없더구만. 그래서 정리를 한번 해봤지. 자료 제목도 그럴듯하게 한번 붙여봤어. 여기 자료에도 있지만 요즘 내가 하는일을 다 담으려면 신문 1개 지면을 다 채워도 모자랄겁니다. 그런데 요즘 내가 하는일 정말 다 써줄거죠?"

1934년생이니까 만으로 따지면 일흔둘. 하지만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의 얼굴에서는 청년의 자신감이 비쳤다.

"오전 5시에 일어납니다. 젊을때는 오전 7시에 일어났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새벽이면 잠을 깨. 아침식사를 직접 챙겨먹은 뒤 산책을 하고, 신문도 읽고.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그런데 요즘은 강연 요청이 너무 많아 바빠요. 때문에 낮 일과가 빠듯해 오후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곯아떨어집니다."

그는 경력이 화려한 사람이다. "도대체 못해본 자리가 뭐냐"고 물었더니 "대통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29살에 미국 미주리주립대 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 재무부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삼성생명보험 회장, 포항종합제철 회장 등 그에겐 항상 '장(長)'이란 글자가 따라 붙었다.

대통령은 못해봤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모두 5명의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박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때에는 경제 관료로서 대통령의 측근이 됐고, 그 이후에는 경제자문역 등을 통해 대통령과 거리를 가까이뒀다.

"가장 점수를 많이 주고픈 대통령요? 물으나마나 박 대통령이죠.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뵜는데, 굉장히 날카로운 인상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일정에 다소 여유가 있는 여름이면 항상 청와대로 저를 불러 얘기를 나눴습니다. 덕분에 '궁정동 안가'에도 자주 가봤지. 만날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경제에 대해 엄청난 열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안정에 힘을 기울인 분이라 평가했고, 뜻밖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좋은 점수를 줬다. 누가 뭐라해도 외환위기 극복을 훌륭히 해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금융기관의 정상화, 재벌의 투명화, 저금리 정책 유지 등을 통해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었다는 점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삼성·현대차 같은 글로벌 기업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무현 정부는 전임 정부의 잘한 점을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도약으로 연결시키지 못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대구 경제 얘기로 옮겨오자, 그는 '섬유 산업의 추락이 오늘날 대구의 위기를 불렀다'고 진단했다. 전자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구미, 철강산업을 무기로 내세운 포항과 달리, 대구는 주력산업이었던 섬유가 힘을 잃으면서 침체를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

"대구는 지금 공업도시에서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제조업 위주의 도시가 아닌, 대구·경북을 아우를 능력을 갖춘 중추도시로 가는거죠. 그렇다면 대구시가 대구를 새롭게 개조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하나씩 바꿔나가야합니다. 3공단 같은 대구 도심 공단을 첨단화하고, 주거와 생산기능이 공존하는 새모습으로 꾸며나가야죠."

그는 대구시가 이제 '사고를 칠 때'가 됐다고 했다. 조용한 시절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

"서울의 경우, 이명박 시장 재임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라는 주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지나고 나니 변한것이 많습니다. 지금 보세요, 이명박 시장 이후, 서울이 조용하니까, '도대체 지금 시장이 누구죠'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시장이 직접 나서 사고를 좀 쳐야합니다."

그는 대구시내를 개조하는 사업과 관련, 민간을 잘 활용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큰 그림은 지방정부가 그리되, 세부적인 사항은 민간이 하도록 놔두면 속도도 빠르고 일의 진척도 잘 된다는 것.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것은 배움의 힘이었습니다. 부농(富農)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기아산업 창업주였던 고모부(김철호) 덕택에 고교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죠. 학부과정에서부터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까지 미국에서 마쳤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 공부를 할 수 있어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대구 수성구 수성1가. 과수원을 했던 그의 부친은 수성교 부근 땅을 대부분 갖고 있을만큼 부농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때부터 가졌던 생각이지만 교육의 질을 높이지 않고 그 나라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했다. 자신은 평준화 찬성론자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의 질을 더 높여야한다는 것.

"지난주에도 대학에 나가 학생들에게 특강을 했는데, 내가 아는 것, 그리고 겪은 일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늙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어요? 나의 경험담을 들려주는데 온 힘을 쏟아야지."

낙동경제포럼 이사장, 산학연구원 이사장, 대구경북경제통합포럼 공동대표, 대구시 경제고문, DGIST 이사, 대한민국 발전포럼 고문…. 요즘도 이런 직책을 맡고 있다는 그는 인터뷰가 끝난 이후엔 정책 좌담회에 나간다고 했다.

"요즘 뭐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요즘도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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