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설이후 고속도로는 지상최고의 대중교통수단이었다. 시내·외 버스와는 격이 다른 고급버스와 미모를 갖춘 '고속버스 안내양'의 친절한 서비스. 미국 서부대륙을 횡단하던 '그레이하운드'버스가 국내에 수입돼 쭉쭉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긴 화장실까지 갖춘 고속버스에서 스튜어디스같은 안내양의 서비스를 받는 여행을 상상이나 했던가.
▶고속버스는 내리막길?
22일 오후 4시. 동대구터미널. 서울행 우등고속버스가 서서히 터미널을 벗어난다. 27석의 좌석 중 겨우 10명이 탑승했다. 아마도 서대구터미널에서 5~6명의 승객이 더 탈 것이다. 이 정도면 다행이다. 평일에는 고작 3~4명만 태우고 서울까지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20분마다 있는 서울행보다 40분 배차간격인 동서울행은 그나마 낫다. 절반이상의 좌석이 찬다.
감색제복이 어울리는 동양고속 기사 권오희(50) 씨는 "예전엔 참 좋았죠..."라며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한다. 하긴 요즘도 괜찮은 직업이긴 하지만 고속버스 기사는 '지상의 마도로스'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16년 경력의 방상식(56) 씨는 "아무나 고속버스 기사가 될 수는 없었죠. 일정기간 이상의 버스운전경력이 있어야 했고 조그만 '빽'이라도 있어야 가능했다."고 회상한다. 그래선지 한 번 고속버스 기사가 된 이후 이직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요즘도 변함이 없다.
KTX 등장 이후 고속버스는 사양길이다. 국내 최대 고속버스 회사였던 한진고속은 적자가 누적되자 고속버스 사업에서 철수하고 동양고속에 넘겼고 코오롱고속 등 일부는 문을 닫았다.
터미널에서 가판대를 운영하는 윤홍자(35) 씨도 "KTX 때문에 망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7년전 가판대를 인수받았을 때만 해도 "재미가 쏠쏠했다."는 그녀는 "요즘 평일에는 2만~3만원 벌이가 안될 때도 많다."며 뜨게질을 하던 고개를 들어 흔들었다.
▶고속버스의 추억.
왕년에 고속버스 한 번 안타본 사람이 있던가. 서울에 볼 일이 있는 '잘 나가던' 사람들이 타던 고속버스였다. 지금도 서울 등 장거리여행을 할 때는 꼭 고속버스만 고집하는 '마니아'들도 있다. 권정옥(53) 씨도 그런 사람이다.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고속버스를 타면 곧바로 서울 강남에 있는 자녀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편하기 때문이다.
출발하기 직전의 고속버스에 오른 정정웅(67.전남 순천) 씨 일행은 "시제에 참석하러 경주에 왔다가 가는 길인데 기차표가 바로 없어서 고속버스를 타러 왔다."면서 "자주 타지는 않아도 예전부터 가끔씩 타고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70~80년대 서울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고속버스 안내양과의 달콤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대기업 중견간부인 ㄱ씨(51)는 "대학생 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다 첫 눈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며 고속버스가 맺어준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고속버스 부활하나
KTX 개통 이후 서울-대구노선이 타격을 입었다지만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대구-포항고속도로 등이 속속 개통되면서 고속버스는 부활하고 있다.
특히 부산노선은 1시간으로 시간이 단축되고 요금도 8천400원으로 내리면서 오히려 열차에 비해 경쟁력을 갖게 됐다. 그래서 운행편수도 26편이나 늘렸다. 포항, 울산, 마산 등 2시간 이내의 단거리노선의 경우 여전히 고속버스는 인기를 끈다. 편한 좌석을 갖춘 쾌적한 버스와 친절한 서비스, 무엇보다 터미널에 오면 곧바로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접근성 때문에라도 고속버스는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다.
안용달 동양고속 노조지부장은 "경부선 신탄진까지의 '주말 버스전용차로제'를 대전까지 만이라도 확대해준다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KTX에 비해 싼 가격도 경쟁력이다. 서울-대구간 KTX요금이 3만8천600원인데 반해 고속버스요금은 2만1천600원(우등)과 1만4천600원(일반)으로 45~63%나 저렴하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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