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 (38)울릉도

울릉도 관문 도동항에서 여객선을 타면 3시간 만에 포항까지 217km 해상이 육지와 연결된다. 해안을 따라 섬을 일주하는 지방도로는 44.2km 구간 중 난공사 구간 4.4km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울릉도는 도둑·공해·뱀이 없고, 향나무·바람·미인·물·돌이 많다 하여 3무(無) 5다(多)의 섬으로 불린다.

◆통조림공장은 일제 수탈정책 결과=포항과 강원도를 오가는 뱃길이 주민들의 유일한 젖줄이며 교통수단이다. 여기에 생필품을 의존하고 삶을 살아가는 '국토의 막내 섬'이다

옛부터 바닷가 주변마을에서는 오징어잡이가 주된 생업이었다. 산자락을 끼고 있는 외딴 촌락 마을에는 취나물, 삼나물 등 산나물 재배가 주 소득원이다.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한 것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300년~1년)로 올라간다. 그러나 어민들의 수산업 활동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1882년 개척령 이후부터다.

조선 초기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실시됐던 1417년 공도정책이 개척령으로 바뀐 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 지역민들이 유입됐다. '나선(전라도 어선)'도 등장했다.

울릉·독도 근처에는 풍족한 수산물이 많았으나 어로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유민들은 주로 농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어업이라야 가까운 해변에서 전복, 소라, 문어를 잡거나 미역, 김 등의 해초를 따는 정도였다. 근해 어업을 위해 등장한 것이 통나무를 연결한 떼배다.

기술적인 어업이 이뤄진 것은 1914년 2월 24일 수협의 전신인 '울릉 어업조합'이 설립되면서부터다. 오징어잡이와 고등어 연승어업이 가능해졌다.

또 당시 도동, 저동, 태하마을 3곳에 통조림 공장이 만들어지면서 수산물에 대한 생산판매 형태가 섬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김하나 독도박물관 학예사는 "이런 공장 설립은 당시 일제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위한 식량수단 마련책의 일환이었다."고 말했다.

섬 개척민들은 어업기술을 발전시켰다. 동해 파도에 적응할 수 있는 어선을 제작했는데, 당시 만들어진 배가 바로 돛을 단 강고배(전마선)였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주된 산업은 농업이었지만 농번기가 아닌 시기에는 꽁치와 오징어잡이를 해 나갔다. 그러다가 흉작 피해가 많아지면서 점차 어업으로 전환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 1963년 포항~부산~울릉도를 왕래하는 부정기 여객선이 생겨나면서 이곳의 수산물을 육지로 옮겨 판매하는 분화 및 분업이 이뤄졌다.

60년대 초반 어선은 목선이 대부분이었고 크기도 소형이어서 5명 이하가 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람과 사람의 힘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동력화한 목선이 등장한 건 1960년대 중반. 1970년대 이후 소형 동력선이 점차 디젤선이나 FRP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또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부 주도로 어선 대형화를 비롯한 어업기술 선진화가 이루어졌다.

어류를 유인하기 위한 집어등과 낚시줄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 꿰어 놓은 주낙바구니, 미역을 걷어 올리기 위해 사용된 수경과 미역낫 등은 점점 현대식으로 교체되어 갔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65년부터 1970년대까지 어업에 종사한 섬 지역 수산인구는 3천704가구·1만8천679명으로 점차 증가했다.

과거에는 명태도 많이 잡혔다. 명태 연승어업은 1957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동절기 강원 등지에서 생산되는 보통 명태는 동태라고도 불렸으나 울릉도에선 봄에 명태가 대량 잡혀 춘태라고 불렸다. 지금은 춘태잡이 배는 없다.

지난 1974년 3만여 명에 육박했던 인구는 섬지역 교통 불편, 오징어잡이 불황, 자녀들의 교육환경 미비 등의 이유로 토착민 이탈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계속 감소해 최근 1만여 명이 전부다.

요즘 읍지역인 도동과 저동마을에는 3·4층 양옥 횟집 등 음식점들이 늘어났다. 섬 마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관광객을 겨낭한 한우 고깃집들도 적잖다. 주민들은 섬을 찾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 업종으로 직업을 전환하는 단계다.

◆'파도를 막자'에서 '하늘길 열자'로=지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공항 유치사업이다. 선박으로는 접근성 해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해 해상의 풍랑으로 연평균 100여 일 뱃길이 끊어지는 관계로 여객선에 의지하고 평생을 살아가기가 너무나 고달프다는 것이다. 신선한 무공해 산나물을 대량 생산해도 뱃길이 가로막아 신선도가 떨어지는 등으로 육지 판로에 어려움이 많아 제값을 못받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항공시대가 개막될 경우 이런 문제를 포함해 관광객 유치 등 소득문제까지 해결된다는 것이다.

김유길(50·울릉군혁신협의회장) 씨는 "개척 125년 동안 울릉 주민들의 슬로건은 '파도를 막자 길을 뚫자'였다. 그러나 최근 주민들 염원은 '하늘길을 열자'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정부와 울릉군이 울릉경비행장 건설계획을 중·장기개발 계획에 포함하고 있지만 지역민들은 조기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울릉 사동마을 가두봉 해발 200m를 13~15m 높이로 깎아 바다를 매립, 방파호 안으로 울릉도 전체 대지 면적보다 2배가 넘는 부지와 해상 활주로를 만드는 방안이 제시돼 군이 타당성을 검토 중이다.

서상백 울릉군 관광과장은 "울릉지역 연간 소득원은 오징어잡이 150억∼200억 원, 특수작물 산나물 재배 50억 원, 관광수입 320억 원 등이다. 이 중 관광소득이 점차 증가해 관광객 유치에 행정력을 쏟을 수밖에 없다."며 "울릉도를 세계적인 관광 섬으로 만들야 한다."고 말했다.

울릉·허영국기자 huhy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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