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신라의 달밤을 걷고 나서

깊어 가는 가을 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 소리와 이른 새벽녘 동해 바다의 파도 소리가 아직도 손에 잡힐 듯 귓가에 맴돈다. 월출과 일출의 황홀함이 극치를 이룬 신라 천년고도 경주의 걷기 대회는 해마다 나를 설레게 했다.

걷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뿌듯함. 66km(165리)의 행보. 그 행복함은 어떤 즐거움과도 견줄 수 없는 자기만족의 경지라고나 할까? 나는 평소 현란한 설악과 내장산의 단풍보다는 창 밖에 보이는 앞산(대덕산·산성산·청룡산)의 낙엽을 더 좋아한다.

갈대와 억새 그리고 숱한 잡목이 어우러진 오솔길을 걸으며 삶을 배우는 것이다. 아름다운 낙엽으로 지는 길. 그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걷고 산을 오르고 끝없는 행보는 계속되는 건 아닐까?

'경사모'(경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주최한 '신라의 달밤 걷기 대회'가 11월 첫 주말 밤, 천년고도 경주 황성공원에서 출발해 다음날 오후까지 16시간 전후의 긴 여정으로 경주 일원에서 열렸다. 해마다 이맘때 열리는 이 행사는 깊어 가는 만추의 정취를 흠씬 담은 월출과 토함산 석굴암의 일출로 참가자의 호연지기와 삶의 긍지를 드높인다.

화려한 식전행사에 이어 황성공원 시민운동장을 가득 매운 선남선녀 건각들은 출발을 알리는 밴드와 불꽃을 뒤로하고 밤 8시경 걸음을 옮겨, 보문 호수를 낀 산책로를 지나 덕동호 뒷길인 암곡마을과 감포 가도를 걸어 자정이 휠씬 지나서야 26km 지점인 추령재에 이르렀다.

주최측에선 컵라면으로 야식을 제공했다. 그뿐인가 장항사지의 꿀 차와 석굴암 주차장의 새벽 국밥 그리고 통일전 앞의 막걸리로 참가자의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에 격려와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 음력 보름 전날의 둥근 달은 별빛마저 잠재우듯 황홀한 얼굴로 가을을 어루만지며 함께 했고, 불어오는 추풍은 춘풍인 듯 오히려 훈훈하기까지 했다.

추령재에서 다시 감포 가도를 걸어 장항리 삼거리에서 토함산 자연 휴양림으로 오르다 보면, 장항사지 석탑의

탑신이 저 만큼 산 중턱에 선연히 돋보인다. 달빛에 오히려 눈물겹다. 이곳에서 느끼는 또 하나 경주여행의 참 멋.

영욕의 천년 사직을 마무리한 신라인의 넋들이 굽어보는 듯, 잠시 여독을 풀 겸 앉아 뜨거운 꿀 차를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신라 천년의 향기를 전신으로 느끼면, 가을과 경주와 달과 바람이 서럽도록 따사롭게 밤 공기를 휘감아 가슴 가득 안겨든다.

밤 3시를 훨씬 지나 다시 무거운 다리를 옮겨 토함산에 올라 길고 긴 능선 길을 하염없이 걸어 토함산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 할 때는 새벽 6시경. 공기가 한없이 맑았다. 멀리 동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며 대종각에서 힘껏 타종을 했다.

산이 웃고 뭇 중생들이 울었다. 타종은 새벽을 일깨우면서 채찍처럼 내려앉았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들고 동해의 일출을 보며 한없는 희열을 가슴 가득 담았다. 아침 7시. 다시 토함산 오솔길로 내려와 불국사를 들어서면 새벽녘 청정한 공기에 그저 숙연해질 따름이다.

경내를 걸으면 주위는 고요 속의 꾸짖음으로 다가선다. 걸음을 옮겨 불국사역이 보이는 '신라의 달밤 기념비'를 돌아서 통일전·화랑교육원·박물관·반월성·계림·대릉원·천마총을 나와서 황성공원 시민운동장에 도착할 무렵, 그렇게도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완보의 기쁨이 더욱 값져 보이는 순간이었다. 완보증과 완보메달을 목에 걸고, 주최측이 준비한 완보기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니, 창밖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밝은 날씨가 펼쳐졌다. 다섯 번째 행사에 다섯 번을 참가하여 다섯 번을 완보한 자신감이 물집으로 아픈 발가락과 육신을 한결 가볍게 했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삶이 그렇듯.... 인생을 길고 긴 여정이다.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웃으면서 내려다보는 단풍보다는 밟히는 낙엽의 여유로움을 소중하게 할 줄 아는 미덕을 오늘도 애써 가져본다. 다가오는 정해년 새해는 국채보상공원의 밤 타종에 이어 새벽 부산 광안대교 위를 걸으며 해운대의 일출로 맞이해야겠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신라의 달밤'을 기대하면서….

윤수국(전 왜관 순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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