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왕의 인물산책] 권태정 서울시 약사회장

"성분명 처방제 도입에 주력"

권태정(權泰禎·55) 서울시 약사회장은 약사여서 행복한 여자다. 새벽에 문 열어 약국에 들어서면 너무나 행복하고, 동네환자들과 건강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재미가 있고 사는 보람을 느낀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좁은 공간을 지키는 약사의 일이 전혀 지겹지 않았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보현약국은 30년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안동여중·안동여고를 졸업하고 오빠를 따라 서울로 유학, 동덕여대 약대를 나와 천직으로 여기는 약사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 모른다. 최근 출간한 '다시 태어나도 약사이고 싶다'는 에세이집에서 그는 약사가 된 사연을 적었다. 한약을 공부한 할아버지는 어느 날 스님 한 분을 집으로 모셔 어린 손녀의 사주를 보게 했다. 스님은 이리 저리 짚더니 사주를 그림으로 쉽게 표현한 '당사주(唐四柱)' 책의 유발(乳鉢·막자사발)이 그려진 페이지를 펼치고는 장래 약과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손자·손녀들을 대청마루에 모아 놓고 가훈인 '신의(信義)'를 복창토록 할 정도로 엄했던 할아버지는 손녀가 대견한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제 꿈은 정해졌습니다. 여중·여고를 다닐 때 한번도 목표가 흔들린 적 없습니다."

권 회장이 장사 잘 되는 약국 일의 울타리를 깨고 주위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25년여 전 영등포구약사회 대방반 총무가 되면서부터. 40여 명의 회원을 결속시키려 야유회, 송년회 등 모임을 자주 만들었다. 난매(亂賣)를 하는 약사를 설득하기 위해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사와 선물로 주곤했다. 폐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약사를 찾아가 문 닫고 소주나 한잔 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강압이 아니라 회원 스스로 마음을 열도록 하는 특유의 리더십이다.

권 회장에게 붙여진 별명이 많다. '철의 여인', '약사회의 잔다르크', '여걸 약사'가 그 중 하나다. 1999년 의약분업 전후 서울시약사회 여약사회장으로 일하던 그가 대정부 투쟁을 위해 '동네약국 살리기운동본부'를 만들고 두 번이나 단식하면서 강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 그는 "저를 '드센 여자'로 여기는 분이 많은데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며 "다만 약사의 권익 보호를 위해 투쟁했을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50여년 서울시약사회 역사에서 첫 직선 회장이자 여성 최초의 회장이 된 것을 보면 '철의 여인', '여걸 약사'라는 별명이 전혀 뜬금없지는 않은 것 같다.

선거 당시 13가지 공약을 한 그는 지난 3년여 동안 12가지는 지켰다고 했다.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모든 회원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취임 한달 만에 지켰고, 자율감시제를 약속대로 도입해 약사의 자존심을 회복했다고 자부한다.

"약국을 감시하는 기관이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청, 서울시 보건국, 각 구 보건소, 경찰서, 건강보험공단 등 7곳이나 됩니다. 약사가 무슨 범죄자도 아닌데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만나 설득하고, 허준영 이기묵 전 경찰청장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결국 자율감시제가 도입됐죠. 그날 혼자서 울었습니다. 나머지 시도로 이 제도가 확산돼야 합니다."

이런 권 회장도 '성분명 처방제' 공약은 이행하지 못했다. 의사가 약의 성분명만 처방하면 약사가 약품을 선택해 환자에게 주는 제도로 약사들의 숙원이다. "서울시약사회장으로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한약사회장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 경산 하양에 있는 시댁 어른을 찾아 뵙고 산소에 들러 인사했다. 그리고 '약사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란 문구가 새겨진 명함을 만들어 여성 최초로 대한약사회장이 되기 위해 뛰고 있다. 약사다운 세상이란 의사가 성분명만 처방하고 제품은 약사 선택해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회복하는 세상이다. "성분명 처방제 도입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미뤄지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을 거친 약품이 2천 품목이 되면 도입하겠다던 것이 4천 품목이 됐지만 정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어요. 두 정권이 약사들을 속인 것입니다. 대한약사회장에 당선돼 성분명 처방제를 반드시 도입하고 싶습니다."

자주 대구에 내려간다는 권 회장은 대구·경북지역 약사 동료들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동네약국 되살리기 운동 때부터 영남지역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철의 여인이 최초의 여성 대한약사회장이 될수 있을지 궁금하다.

서울정치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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