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김영남 作 '가을밤이 되면'

가을밤이 되면

김영남

달, 저 달을 싸리울에 묶어본다

허름한 말뚝에 매어본다.

그러면 달은 짖는다. 짖어 푸른 밤이 된다.

나는 푸른 밤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가 묶어둔 달을 풀어준다.

달은 깻단 이고 오는 어머니를 따라온다.

살랑살랑 꼬리 치며 삽살개도 따라온다.

이번에 달 대신 개를 묶어본다.

달은 어느새 동산 위로 올라가고

개는 기둥 주위를 맴돌며 밥그릇의 달빛을 핥는다

마치 동료처럼.

그러면 지붕 위에는 외삼촌 닮은 얼굴 하나

백자 항아리 술병을 허리에 차고 웃어오고

어디에선가는 위험 신호의 호루라기 소리들.

그 소리에 이어 푸른 바닷물 밀려오는 소리들.

이내 나는 허우적거릴 것 같아

허우적거리다가 지붕과 함께 잠겨버릴 것 같아

익사 직전의 구조 요청을 누군가에게 하게 되고

달, 저 달은 날 가둔다. 바다 한가운데 가두고

고백하라. 반성하라 고문을 해 온다.

가을밤의 달은 눈(眼)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라본다. 가을밤의 달은 차라리 가슴에 젖어 온다. 마음에 젖어든 가을밤 달을 '싸리울에 묶어 보'기도 하고 '허름한 말뚝에 묶어 보'기도 하면, 달은 유년 시절의 삽살개가 되어 짖는다. '짖어 푸른 밤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달이 풀어 놓은 '푸른 밤 속으로 들어가'면 '깻단 이고 오는 어머니'도 보이고 '백자 항아리 술병을 허리에 차고' 오는 외삼촌도 보인다. 얼마나 정겨운 얼굴이고 따뜻한 정경인가. 세속적·감각적 욕망에 휩싸여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이 아닌가.

가을 밤 달빛은 우리로 하여금 도시적 삶의 불순함을 고백하고 반성하게 한다.

구석본(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