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에 나오는 '당나귀 팔러 간 부자(父子)'이야기 아시죠? 지금 우리 신세가 딱 그래요."
경찰청의 한 고위 간부는 최근 수개월간 경찰이 집회시위 대처방안에 대해 여론의 눈치를 너무 살피다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간부가 예로 든 이솝 우화는 당나귀를 팔려고 시장에 가던 도중 마주친 행인들의 말을 줏대 없이 따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우화에서 부자는 번갈아가며 당나귀에 탔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던 끝에 당나귀를 장대에 묶어 어깨에 메고 가다가 결국 냇물에 빠뜨려 버렸다. 경찰입장에서 보면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최우선 과제인 비폭력 평화집회 문화정착에 소홀했다는 반성인 셈이다.
지난 9월 하순 경찰 지휘부는 "심각한 교통불편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대규모 도심집회를 금지하는 방안을 사안별로 적극 검토하라."는 지시를 일선에 내려보냈다. 시위에 따른 교통체증이 빈발하면서 여론의 비난이 경찰에 쏟아진 데 따른 대응이었다.
이후 한동안 경찰의 집회 대책은 폭력 방지보다 교통체증 감소, 특히 대형 집회가 많은 주말 서울 지역에서의 교통 소통에 무게가 쏠렸다.
경찰의 이런 방향 전환은 지난 12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가 무사히 끝나면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열흘 뒤인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가 주최한 전국 동시다발 집회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지면서 경찰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서울 집회는 무사히 마무리됐지만 대전, 광주, 춘천 등 일부 지방에서 관공서 난입 시도, 방화, 전·의경 폭행 등 폭력 시위가 발생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범국본이 29일 서울에서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2차 대규모 집회를 강행키로 하면서 경찰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집회 원천봉쇄' 방침에 맞서 주최 측이 집회를 강행할 경우 폭력사태가 재발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특히 경찰 지휘부가 1주일 전부터 집회 금지와 함께 범국본 지도부에 대한 사법처리 방침을 천명해 일선 경찰과 시위 주최 측이 협상할 여지가 없어진 점도 부담이다.
주최 측 관계자 상당수가 휴대전화를 끄고 잠적해 연락이 되지 않아 경찰은 집회시각, 장소, 인원에 대한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도 몰라 제대로 집회 관리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 돼 버린 것이다.
경찰의 난처한 입장을 이솝 우화에 비유했던 경찰 간부는 "지나가는 사람들 말만 듣다가 '평화적 집회시위 문화'라는 당나귀가 물에 풍덩 빠져 버리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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