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생불량성 빈혈로 고생하는 최유미 씨

작년 이맘때 아버지(77)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6·25 참전 후유증으로 평생을 술로만 지내셨던 분이라 가족들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요. 저 역시 담담한 심정으로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빈소를 찾은 그날 저녁. 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엄마는 자꾸 쓰러지는게 이상하다며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했어요. 단순 빈혈인줄만 알았던 전 지난 3월 연세세브란스 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주 쓰러지고 피가 멎지 않았던 것은 몸에서 피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골수이식을 못하면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더군요.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물었어요. "아니죠. 거짓말이죠. 검사 결과가 잘못 나온거죠." 울먹이며 애원하자 골수만 맞으면 살 수 있다고 절 안심시켰어요. 검사결과 오빠(35)와 골수가 맞았지만 수술비 5천만 원은 저희 가족 누구도 구할 수 없는 돈이었지요. 자식 셋을 낳고 트럭운전하는 형부와 힘겹게 사는 언니 가족을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는 없었어요. 중학교를 중퇴하고 겨우 기계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오빠에게 손을 벌일 수도 없었지요. 그날 전 조용히 생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겨울까지 남은 생을 보람있는 일로 채우고 싶었지요.

6월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5년의 메이크업 경력으로 프리랜서로 일하게 됐지요. 수혈을 받으며 연장한 하루를 10년 같이 쓰며 열심히 일했어요. 신부화장이나 분장 섭외가 있는 날이면 30만 원까지 벌 수 있었어요. 모은 돈은 모두 다 수혈비와 약값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약을 먹은 후부터 몸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빈혈처방제로 알고 먹었던 약성분에 남성호르몬이 들어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생리혈이 멎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기에 전 하루하루 남자가 돼 갔어요. 몸에 털이 나고 목소리가 굵어지고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제 모습에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이렇게 변해가다 어느 순간 죽는다는 게 미치도록 무서웠어요.

결국 엄마(69)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고 다리까지 불편한 엄마는 제 수술비 마련을 위해 공공근로 일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울부짖었습니다. 우린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엔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었지요. 수술비를 마련해보겠다고 연탄 한장 쓰지 못했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습니다. 20만 원을 두고 그 길로 다시 대구로 올라왔습니다. 수혈비 20만 원을 주고 온 길이라 병원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입이 돌아가고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피가 모자라 나타나는 증상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죽음이 가까이 있는지 몰랐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 응급실이습니다.

27일 매일신문사 인근에서 만난 최유미(29·가명) 씨는 큰 메이크업 가방을 짊어진채 미소를 보였다. 작고 다부진 얼굴에선 그동안의 가슴앓이가 느껴졌다.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요.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더군요. 마지막을 함께 보내자고···" 최 씨는 마지막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랫동안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 그는 "왜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살아있는게 너무 힘겹다."고 털어놨다. 차디찬 겨울 바람속에 자신도 한 줌 재가 될지도 모를 그를 차마 바라보기가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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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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