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즐거운 일들

"...눈도 코도 귀도 입도 없는 세월이니 단조롭기 짝이 없지만 지난 3년을 돌이켜볼 때 참으로 빠르게 흘렀다. 견디는 현재는 지루한 데 지나버린 시간이 빨라 뵈는 것은 내용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1년 전 그 날이나, 한 달 전 그날이나, 그제의 날이나 어제의 날이나 꼭 같이 무 내용 하니까, 흘러가버리고 나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상범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3년을 복역한 형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전에 읽은 것이니 세세한 내용은 까맣지만 이 구절만 생각난다. 또 매년 12월만 들어서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기도 하다.

'벌써' 12월이라는 말을 쓴다. 이맘때면 늘 '벌써'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연말이 돼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참 빨리 흘러갔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나오는 감옥속의 형처럼, 올해도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한 해를 무내용하게 보냈다는 자조감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이런 자조감에 시달렸던 까닭에 새해의 첫 시작때면 늘 '올해만은' 하면서 어쭙잖은 결심도 해보지만 늘 슬금슬금거리다 연말을 맞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연말이 다가오면서 생각만해도 '영혼이 따뜻해 지는' 즐거운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비록 직접 일을 벌인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소개함으로써 올해만은 되풀이되던 자조를 그만둘까 싶다.

첫 번째 즐거움은 지난 11월초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스 유격수 박진만으로부터 왔다. 올해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면서 수상한 최우수선수상 상금 1천만 원을 불우이웃시설에 기증한 것이다. 박은 이미 2004년에도 이 곳에 1천만 원을 전한바가 있다. 사실 박은 올해 연봉만 4억5천만 원이고, 요즘이야 웬만하면 '억, 억'이 판을 치는 세상이어서 1천만 원은 크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에게 1천만 원은 엄청나게 큰 돈이다. 더구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다른 즐거움은 꿀벌 사나이 안상규 씨로부터 갑작스럽게 전해졌다. 안 씨는 매일신문의 지난달 29일자 10면 이웃사랑 난에 실렸던 최유미(29·가명) 씨의 이야기를 듣고 1천만 원을 내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최 씨는 재생불량성 빈혈로 5천만 원의 골수이식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취재기자를 통해 알아보니, 최 씨의 절친한 친구가 바로 안 씨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최 씨는 친구에게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월차를 내 여행이라도 같이 갔음 좋겠다.'고 전화를 했고, 참으로 막막했던 그 친구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본 안상규 씨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병원을 알아보고 자신이 먼저 1천만 원을 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드라마같은 이 일의 과정이 신기하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또 취재기자는 취재기자대로 기사가 나간 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많은 분들이 성금을 보내주셨다며 몇 장에 걸쳐 빼곡하게 이름이 적힌 통장을 들고 신나했다.

즐거움은 계속됐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두 통의 전화가 왔다. 한 분은 함자를 여쭙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로 보아 나이가 지긋한 분같았다. 이 분은 "돈이 없어 사람이 죽는다는 게 도대체 가당한 일이냐?"며 "지금까지 성금이 얼마나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하룻동안 들어온 금액을 대충 말씀드리자 "그 기사를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5천만 원은 너무 큰 돈"이라며 "형편은 넉넉하지 않지만 적극 돕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매주 일정 금액을 계좌이체를 통해 이웃사랑 팀에게 보내겠다고 했다. 매주 수요일 '이웃사랑' 기사가 나갈 때마다 성금을 보내주시는 그 마음들에는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감히 미치지 못할 것이지만 이렇게 나마 정말 감사드린다.

정지화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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