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배추값 폭락에 미안한 마음 가득

몇 년 전 남편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치 안 담았으면 배추 좀 뽑아 가이소오. 속은 안 찼지만 구수하니 맛은 있을 끼임니더." 여름에 토마토농사를 짓고 난 뒤 배추를 심었는데 올해처럼 배춧값의 폭락으로 논을 갈아엎으려다가 전화를 했단다. 그 전화를 받고 단숨에 달려갔는데 비닐하우스 안의 배추들이 방긋 웃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애써 농사지은 것을 가져오기는 민망스러웠지만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욕심이 발동해서 차에 가득 실었다.

집에 갖다 풀어 헤쳐 놓으니 태산 같은데 이웃에 쌈배추하라고 좀 나누어주고, 모든 그릇을 동원해서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소금을 뿌려서 숨을 죽인 다음 걸쭉하게 찹쌀풀을 쑤어서 마늘과 고춧가루만 넣어서 대충대충 버무려서 김치 냉장고를 채우고 그릇그릇 채워도 남아서 스티로폼 박스를 몇 개 구해서 비닐을 깔고 밀봉을 해서 응달에 땅을 파고 꽁꽁 묻어두었다. 이듬해 춘분이 지나고 따뜻한 봄날의 그 김치 맛,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공짜로 얻은 배추로 김치를 담가 열네 집이 나눠먹으며 즐거워했다. 남이 지은 농사로 인심은 내가 쓰고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그때 미안함과 고마움이 생각난다. 언젠가 내가 농사를 지어서 맛있는 김치를 담가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날이 있으리라.

김옥순(대구시 달서구 파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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