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시장·지사님, 담요 드릴까요

20여 년 전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했던 세칭 TK전성시절, 정부예산을 짜고 전국 시도 기관단체에 얼마씩 나눠줄 것인가를 결정하던 막강한 실력자는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으로 있었던 문희갑 전 대구시장이었다.

그분께서 며칠 전 민선출범 6개월이 돼가는 김범일 시장과 김관용 도지사를 두고 '잘해 나가겠지만…'이라는 덕담과 함께 당시 호남지역 기관장들의 예산투쟁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그때 호남지역 지사, 기관장 심지어 대학총장 같은 분들도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제 집 앞에서 며칠씩 진을 쳤어요. 초겨울인데도 대문 밖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아예 밤을 새우는 겁니다. 결국 내 쪽에서 민망해 사흘째 날쯤인가 새벽에 문을 열고 나가 집안으로 모셨지요.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막상 얼굴 맞대고 예산이 필요한 배경이나 현지 사정을 조목조목 듣다 보면 이해가 가고 설득당하게 됩니다. 그분들 그렇게 (추운 새벽 공무원 집 앞에 밤샘 노숙해가며) 예산투쟁을 했어요."

그동안 세상은 바뀌었다. 담요를 쓰고 대문간에서 새우잠을 자던 쪽 사람들이 전화 한 통으로 '포시랍게' 예산 따내던 옛 TK시절 사람들에게 거꾸로 '얼마 줄까?'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출범 6개월이 다 돼가는 우리 시장님과 지사님도 담요가 아니라 거적을 쓰더라도 예산만 따낼 수 있다면 문전노숙도 해야 할 만큼 사정이 급하다.

엊그제 154개의 공약 과제를 확정 발표한 김 시장 경우 그 많은 의욕적인 꿈도 예산확보 없이는 한낱 봄꿈이다. 그동안 김 시장의 소리 없는 '발품'은 나름대로 '애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유치 특위구성을 이끌어낸 것도 그런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밀고 간 발품의 소득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300억 원 정도로 추산되는 대회 후원기업 선정이 김 시장이 풀어야할 先決(선결)과제다. 모든 지역현안과 비전의 키워드(Key-word)는 꿈이나 그림이 아닌 '예산'인 것이다.

김관용 도지사의 경우도 사정은 같다. 비록 아직 담요 쓰고 문전노숙까지는 않았지만 대기업 CEO나 해외동포실업인 등 투자유치의 희망이 담배씨만큼만이라도 보이면 왕의 남자든 거지의 여자든 소매 끝을 놓치지 않고 있다.

도지사공관도 통상교류를 위한 영빈관 구조로 뜯어고쳤다. 대통령 숙소로나 쓰던 공관을 투자유치 전초기지로 바꾼 발상전환은 '담요노숙정신'에 가까이 다가갔다 할 만하다. 물론 집이나 뜯어고친다고 外資(외자)가 저절로 굴러들어오느냐는 시각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구의 모 철강회사는 회사 안에 일본 風(풍)의 정원과 콘서트홀을 꾸민 4억짜리 영빈관을 지은 뒤 초청된 일본철강회사 CEO를 감동시켜 수십억의 수출 물량을 따냈다. 문화적 경영마인드로 몇 곱 장사를 한 경우다.

바야흐로 문화경영, 감동경영의 시대인 것이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데 두 분을 치켜세워줘가며 잘 부려먹는 게 지역발전을 봐서도 유익한 일이다. 시간이 가도 헤매고 있으면 그때는 회초리도 들어야겠지만….

따라서 지역민들도 두 사람을 잘 도와주고 부리기 위해 마인드의 전환, 지역문화의 변혁을 시작해보자. 우선 손쉬운 것은 시장, 도지사를 예식장, 장례식장에 부르지 않고 웬만한 행사장엔 오라가라 청하지 말자는 캠페인 같은 것도 좋다. 결혼식 한 번 오가는 데 1시간 얼굴도장 찍는 데 20분이 후딱 날아간다. 장례 문상까지 하루 두 군데면 3시간이다. 그 시간에 담요 쓰고 예산 따내게 하는 게 득이란 얘기다.

행사장에 안 와도 섭섭하다 욕 안 하면 맘 편히 지역 전체를 위한 심부름을 더 할 수 있다. 지역민이 그런 아량과 배려로 아껴주고 기대해주면 두 분은 아마 '예산 따오게 담요도 좀 빌려주십시오'할지 모른다. 서로서로 감싸며 돕는 가슴 뿌듯한 대구'경북을 만들어 가보자.

김정길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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