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아 해 줄 상대가 없지만,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반 아이들에게 듣거나 말거나 고리타분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 중의 하나가 겸양지덕이다. 요즘 같은 자기광고 시대에 웬 케케묵은 소리냐고 뜨악해하지만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이라고 우긴다. 더구나 미래 사회를 이끌 청소년들에게는….
일찍이 노자는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서 몸을 낮춘다.'하여 관리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겸양을 꼽았다. 송(宋)나라 정고보는 사(士)에 임명되자 등을 꾸부렸고, 대부(大夫)에 임명되자 허리를 곱사처럼 굽혔고, 마침내 경(卿)에 임명되자 몸 전체를 구부리고 항상 담장을 끼고 다녔다 하니, 어찌 존경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겸양은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범인들에게도 유익하고 필요한 덕목이다. 양자가 송나라로 가는 길에 어느 여관에 들렀을 때 여관 주인이 미색의 첩보다 박색의 첩을 더 총애하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저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만하기에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이 여자는 자신의 못남을 겸양하기에 나는 그녀의 추함을 모릅니다." 겸양은 이렇듯이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주는 신비로운 작용을 한다.
20세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슈바이처는 한평생 겸양을 실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고향으로 모금하러 갔을 때 일이다. 당연히 1,2등실을 타고 올 줄 알았던 그가 뜻밖에도 맨 뒤칸의 3등실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보고 한 영접객이 물었다. "아니 박사님!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때 그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나는 오래 전에 잠깐 함께 근무한 선배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 못한다. 그분은 늘 한참 후배인 우리들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우리가 민망해 그 일을 거론하자 이렇게 말씀했다. "제가 선생님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선생님들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매사에 무람없던 우리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강한 사람이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겸양지덕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진정 강하고도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가 한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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