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서울에서 일 다 끝내고 이제 아주 왔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다. 한 달에 서너 번씩 드나들어도 어머님은 항시 반기시며"밥 먹었나?"하시며 아들 배고픔부터 먼저 걱정하셨다. 손자, 손녀, 증손자, 증손녀까지 안부를 챙기시고, 밤이면 손수 이부자리를 펴주시며 요강까지 마련해 주시곤 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님은 아침이면 요강을 닦으셨고 계절에 따라 겨울철엔 외풍을 막아주고 여름철엔 모기를 막는 휘장인 방장도 일일이 챙기곤 하셨다.
그러나 이제 인사를 받으실 어머니는 안 계시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빨리 서울 올라가야지"하시며 당신보다 직장에 매인 아들의 신분적 굴레를 더 걱정하시던 어머니.... 아직도 내 가슴속엔"부디 조심해라", "전직 대통령도, 장관도, 국회의원도 붙잡혀 간다는데 배고프면 집에 돌아오면 된다."며 노심초사 바르게 살 것을 당부하시던 그 목소리가 항상 귓전에 남아 있다.
몇 해 전, 서울 S대학교 김모 교수가 경주 여행길에 어머님 문안차 다녀간 일이 있었다. 김 교수를 보신 어머님께서는 苦笑(고소)하셨다.
"김 교수는 아직 젊은데 우리 아들은 왜 머리가 희고 저래 늙었노?"
그 후 나는 어머님을 뵈올 때면 老態(노태)를 숨기기 위해 이발 등 몸치장에 각별히 유념하였다.
'세월이 여류하니 백발이 절로 난다/뽑고 또 뽑아 젊고자 하는 뜻은/(北堂(북당): 어머님 계시는 방, 혹은 어머니를 일컫는 말)에 親在(친재) : 어버이가 살아계시니)하시니/ 그를 두려워함이라' 영조 때의 歌人(가인) 김진태가 남긴 시조 한 토막이다. 자식 된 몸으로 부모님 보시기에 늙어 보인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니 불효가 아닐 수 없다. 옛날 중국 楚(초)나라의 현인이요 24 효자의 한 사람이라는 老萊子(노래자)는 늙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나이 일흔에 때때옷을 입고 어린 아이 흉내를 내었다 한다.
어머님이 우리 가문으로 시집오신 건 1921년이었다. 1971년에 지아비를 잃으셨고 78년의 세월 동안 가난의 굴레에서 밥 짓기, 농사일, 先塋(선영) 보존, 가족 부양 등에 평생을 바치셨다.
1943년 일제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던 흰 옷 착용을 금했다. 읍내 입구에는 먹총을 든 순사들이 지키고 서서 흰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시커먼 물이 나오는 물총을 쏘아댔다. 무명은 공출 품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미군의 폭격을 피하려면 조선옷인 흰옷을 입어야 한다.'는 소리가유언비어처럼 떠돌아, 집집마다 몰래 흰옷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손길이 바빴다.
도지사로 있을 때, 자동차를 대기해 놓고 어머님께 친정 나들이를 권했으나 한사코 사양하셨다.
몇 년 전에는 동네 노인들과 함께 관광을 다녀오시는 길에, 그만 버스 추돌사고를 당하신 일이 있었다. 승객이 모두 노인들이었으니 사태는 심각했다. 논바닥에 노인들을 눕히고 나서 경찰이 연락처를 물었다.
"할머니, 연락처가 어딥니까?"
"연락처 없다. 집에 가문 된다."
"전화번호는 요?"
"우리 집 전화 없다."
"그럼 자제분들 연락처라도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 연락을 하죠."
"내는 자식 없다."
후에 내가 왜 그러셨냐고 여쭈어보니,
"너들헌테 걱정 끼칠까 그랬다. 관광이나 하고 다니는 게 창피스럽기두 허구..."
그 후, 어머님은 절대 관광을 다니시는 일이 없었다. 어머님의 마음속에 맺혀 풀리지 않은 恨(한)이 있다면 장남인 나에 대한 것이다.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다. 다만 너를 중학교에 보내지 못해 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하셨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