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비(雨)가 수풀처럼 쏟아져 내리면 장마(霖)요, 길바닥에 내려 맺힌 것이 이슬(露)이며, 흩어져 내리는 것이 싸라기(霰)라면, 눈은 비로 쓸어내야 하기에 설(雪)이라고 한다.

제법 많은 눈이 전국에 내렸다. 큰 눈이 내린 뒤에는 교통 혼란 등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엄청나다고 한다. 눈을 제때에 쓸어내지 않으면 출근길 지체를 비롯해서 의외의 사고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도 눈은 풍년을 약속해주는 서설(瑞雪)이라는 농경민족의 전통적 관념 때문인지, 설화(雪花)도 꽃이라는 심미감 때문인지 우리 민족은 눈 치우는 데 둔감한 편이다. 이렇듯 우리는 위기에 대한 불감증과 망각습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저무는 올 한해는 중동전쟁이라는 외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급기야 한반도에는 핵실험이라는 악재가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곧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난리들이었고 국론마저 분열되더니, 최근엔 그 야단법석에 비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관심한 모습이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망각해버리는 우리의 부정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줄기세포의 진위논란으로 시작된 병술년은 바다이야기와 FTA·전시작전통제권으로 인한 대미갈등, 부동산 광풍,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숨가쁜 한해였다. 이외에 저출산과 고령화사회 진입, 사립학교법 재개정, 연금법 등 갈등의 요인을 안고 있는 사회적 이슈가 그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은 또 다른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다. 내일의 훌륭한 지도자를 선택하려면 우리의 어제를 되돌아보고,

지금 서있는 오늘을 인식해야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이 만든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국민의 전폭적 추앙을 받는 대통령이 없고, 모든 대통령들이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듯한 것은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는 영웅을 만들어내지 않는 나라라고들 한다.

기껏 나무에 올려놓고서는 쉽게 흔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려운 자리에 앉혀놓고 힘든 일을 시켰으면 격려와 성원이 있어야 한다. 인내를 갖고 지켜보면서 조력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쉽게 흥분하고 망각하는 우리 국민성은 훌륭한 지도자와 영웅의 배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무는 많은데 산은 없는 격이다.

그러다보니 이 나라 지도자들은 성과주의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낙마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보호막을 두텁게 하고자 모든 정치 행정을 당리당략적으로 하게 된다. 국민들의 가벼운 정치의식과 지도자들의 임기응변식 행태가 엇박자의 연속으로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불행한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소박하게 시작해서 오래도록 가꾸어 갈 줄 아는 지혜로운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서울시 노숙인 사회복지시설협회장으로서 '서울시 노숙인 일자리 갖기 프로젝트'사업에 참여했었다. 이런 인연으로 다시 직업을 갖게 된 노숙인 아저씨들과 서울시장 퇴임식에 갔었는데, 이명박 전 시장의 고별사 중에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시청 앞 광장에 스케이트장을 설치했더니 그걸 이용한 시민들이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 내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되새겨 볼 만한 말이었다.

우리 국민들은 지도자에게 너무 크고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작은 것이라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만족해하는 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자는 부동산 광풍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며, 작은 실생활에서부터 만족을 느끼도록 해주는 현실경제 감각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심난했던 한해일수록 성탄절은 우리에게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나와 남을 초월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하고자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다. 인류평화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부터 변하는 데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는 자작자수(自作自受·스스로 짓고 받음)를 말씀하셨다.

어김없이 병술년 한해도 곧 짙붉은 노을이 되어 서녘 하늘을 물들일 것이다. 다가오는 정해년은 우리 모두 초심을 잃지 말고 늘 처음처럼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지거 스님(조계종 보현의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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