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대통령-고건 밀월서 파국까지

"제가 동그란 돌이라면 총리는 이 돌을 잘 받쳐주는 나무받침대 처럼 돼야 적재적소다"(2003년 1월18일 TV토론) → "오히려 저하고저희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왕따가 되는 체제가 됐다"(2006년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위). 고 건 전 총리를 참여정부 첫 총리로 기용할 때 '몽돌과 받침대론'을 폈던 노무현 대통령이 21일 '고건 카드'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며 나무받침대 역할이 만족스럽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하룻밤 감정을 삭혔다가 22일 성명을 내고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며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라고 정면 반박했다.

한때 국정의 제1, 2인자로 밀월관계를 구가했던 노 대통령과 고 전 총리가 '파경'을 맞고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이 참여정부 출범 때 '고건 카드'로 보수층을 껴안으려는 시도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을 한 데 대해 고 전 총리가 "오만과 독선"이란 격한 표현으로 맞받아치면서 두 사람 관계는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

'개혁 대통령-안정 총리'로 표현되는 두 사람의 보완적 조합이 결국 무모한 시도였음을 공언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된 직후 고 전 총리를 참여정부 초대 총리로 낙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혁을 표방하는 참여정부가 박정희 정부 때부터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을 기용해선 안된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과 고 전 총리 사이는 서로 단점을 상쇄해주는 '보완관계' 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부터 그다지 순탄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86 중심의 청와대 참모들 사이에선 "총리가 소신이 없다"는 불만이 나왔고, 행정 전문가들이 포진한 총리실에선 "청와대 사람들과 코드 맞추기가 힘들다"는 얘기가 많았다.

2003년 말에는 국회 답변에서 고 총리가 대통령 측근비리와 국정난맥상에 대해 "대통령과 측근과 정부의 책임"이라고 소신 발언을 한 것을 두고는 고 총리가 결별을 각오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돌았다.

양측의 갈등이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한 와중에 대통령 탄핵사태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고 전 총리의 권한 행사에 대한 청와대의 견제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고 총리가 중앙청사에서 주재하려 했던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가 무산되는가 하면 강금실 법무장관은 국회 탄핵소추안 결의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행사 범위의 한계를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 파장을 일으켰다.

고 전 총리도 이에 맞서 강 장관이 탄핵반대 집회에 관용적 태도를 취하자 불법집회를 원천봉쇄하는 등 갈등이 이어졌다. 고 총리가 2004년 5월말 탄핵에서 복귀한 노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을 뿌리치고 정동영 김근태 정동채 장관 내정자에 대한 각료제청권 행사를 거부한 것도 당시 갈등의 연장선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고 총리는 "물러나는 총리가 신임 장관을 임명제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자신이 정작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행사하고 물러난 것과는 모순적으로 비치면서 "'큰 뜻'을 품은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됐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았던 갈등관계는 대선정국 초입에서 고 전 총리가 '큰 뜻'을 구체화하면서 노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나서자 수면 위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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